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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26. 2023

비 오는 월요일엔 막걸리가 좋다

연봉 800 반백의 미니멀 라이프 _ 9. 막걸리

비 오는 날엔 막걸리가 좋다. 특히나 오늘처럼 회사 가기 싫은 월요일엔 더 그렇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비 소리를 들으며 파전을 부치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냄새까지 더해진다면 금상 첨화겠지만 신김치에 두부, 막걸리 한 병만 있어도 아쉽지 않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알콜 인생은 나름 화려했다. 술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라고 말해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던 듯싶다. 술 그 자체가 좋았던 것이 틀림없다. 소주든, 맥주든, 막걸리든, 와인이든, 위스키든, 사케든, 빼갈이든 가리지 않고 다 마셔댔으니까. 


술을 마시면 사람이 변했다. 술기운이 오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누가 묶어 놓지도 않았는데 꽁꽁 닫아두었던 마음을 열어젖혔다. 평소 냉정하고 싸늘하고 싹수없는 재수탱이에서 풀어지고 늘어지고 웃음이 많아지는 관대한 사람으로 변했다. 술자리는 대개 2차에서 3차 그리고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술 한잔 걸치고 시원하게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그 하루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간 것 같았으니까. 이 역시 중독이라면 중독, 주사라면 주사일터.


교육, 조직문화 업무는 그런 술자리에 날개를 달아줬다. 신입사원 교육에, 현업 리더와의 만남에, 사장님 간담회에 술이 포함된 뒤풀이는 옵션처럼 따라붙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주일에 두세 번은 기본, 그 무수한 술자리에도 이렇다 할 불상사가 생긴 일도 없었다. 


늘 3차까지 과음을 하고도 다음날 멀쩡한 척 출근했다.

"나 어제 2차부터 기억 하나도 안나잖아. 뭐 실수한 건 없지?" 숙취에 시달리며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후배들은 "와 L님 그렇게 드시고도 멀쩡하시네요" 라며 놀랐다. 단 한 번의 블랙아웃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는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 술세다' 라는 무용담 만들고 내심 즐겼던 모양이다. 마치 내 몸이 금강불괴쯤 되는 줄 착각했던 그 시절...


무슨 보약도 아니고 그렇게 쌓아 올린 음주의 시간은 마흔이 넘어 마침내 몸을 망가뜨렸다. 혈중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가 정상 범위를 초과했고 고혈압 근처까지 갔다. 매년 한 군데씩 전년에 없던 증상이 생겼다 없어졌다 했다. 그 서늘한 시그널들을 무시하고 똑같은 생활을 반복한 결과는 심각한 역류성 식도염과 공황발작으로 몸과 마음을 무너뜨렸다.


퇴사를 하고, 술부터 끊었다. 아니 끊겼다. 만나는 사람이 없어지자 강제로 술자리가 사라졌고 그렇게 2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몸과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비로소 그 이전의 내가 보였다. 


"나는 스트레스도 잘 안 받는 사람이야."

사실 나만 몰랐던 거다. 누구보다 스트레스를 잘 받고 예민해지면 타인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술자리로, 노래방으로 풀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 속시원히 감정을 털어내지도 그렇다고 넓은 마음으로 품지도 못했던 평범한 축에도 들지 못했던 고집불통 대마왕.


책을 내고 책을 핑계로 조금씩 이전의 인연들을 만난다. 술이 빠질 수 없다. 그 전과 다른 게 있다면 한두 잔만 마셔도 몸이 힘들어진다. "아니, 예전의 L님은 어디로 갔어요?" 2차는 어림도 없다. 열이면 열 깜짝 놀란다.

"내 머리 하얗게 센 걸 봐. 술 이거 잘 마셔야지. 보약 아니다."


소주, 맥주, 양주, 빼갈, 사케가 모두 힘들어졌다. 두 잔 이상 들어가면 몸이 힘들고 졸음이 밀려온다. 술기운이 오르면 기분이 즐거워지던 감정도 사라졌다. 그렇게 술이 싫어지려던 찰나. 비 오던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보니 막걸리 한 병이 눈에 띈다. 


변변한 안주도 없이 포카칩 한봉 뜯어 홀짝 거리며 마신 막걸리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퇴사 후 처음으로 불안감이 사라졌다. 기분이...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비 떨어지는 소리가 좋은 사람의 소곤거림 같다.


오늘, 또 비 오는 월요일에 슬리퍼 신고 막걸리 한병 사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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