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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l 30. 2023

기념일 따위 없으면 좋겠다

백수가 되고 곤란한 일이 있다면 매년 반복되는 기념일이다. 때 되면 빌린 돈 갚으라며 찾아오는 사채업자 마냥 그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속 무게추가 한 개씩 늘어나는 것 같다


애초에 기념일을 살갑게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철이 들어서야 부모님 생일정도를 달력에 표시해 두고 신경 쓰는 정도였으니까. 내 생일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챙겨주면 받고 아니어도 별 상관없었다. 생일이 낀 그 주를 생일주간으로 정해 몇 번씩 birth day파티를 해대는 미국인이 보면 기겁할 정도로 생일 그 자체를 호들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그만큼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살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특정한 날보다는 아무 날도 아닌데 불쑥 뭔가를 주는 일을 더 좋아했다. 넓은 관계보다는 좁지만 깊은 관계를 선호했던 내게 가족을 제외한 소중한 사람은 그야말로 손에 꼽는다. 어느 날 문득 좋은 것이 보이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구해놨다가 '생각나서 샀어' 라며 그냥 건네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값어치로 따지면 보잘것없고 소소한 것일지라도 생각지도 못한 '선물'로 인식해 과하게 기뻐해주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정작 받는 상대 입장에서 그다지 쓸데도 없는 물건이라면 억지 감정을 자아내야 하고 나도 똑같이 해야 하나? 라며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어쩌면 상대의 기쁨보다 내 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였을지도...


어제는 엄마의 생일이었다. 백수가 된 지 4년 차에 맞는 네 번째 생일잔치. 


"엄마. 뭐 갖고 싶은 건 없어요."

"그냥 와. 밥 먹고 가."


곧 50을 앞둔 큰 아들이 준비한 선물은 파리바게트 케익이 전부였다. 일 년에 한 번 부모의 생일선물 살 돈은 왜 없겠는가? 아무리 4년째 수입이 끊긴 백수라지만 그 정도 돈은 있다. 


"밥솥 고장 났다며?"

"XX이가 사 왔어."

명품백이나 시계까지는 무리어도 고장 난 밥통이나, 이가 나가버린 아버지의 면도기 정도는 충분히 사드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이미 동생들이 선수를 쳤다


"아, 뭐야 내가 사드린다니까."

"다 있어. 그냥 와."

"그럼, 케익은 내가 사갈게요."


못 이기는 척, 아쉬운 척 나는 케익으로 이번 생일을 퉁친다. 작년보다 재작년보다 재재작년보다 조금씩 낯이 두꺼워진다. 그래도 괜찮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야 선물이니까, 형편 뻔히 아는 아들의 값나가는 선물을 받고 온전히 마음 편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등심을 굽고, 장어를 굽고, 소맥을 말고 왁자지껄 파티를 연다. 그리고 내가 사 온 케익이 상에 올라 69개의 촛불이 활활 타오른다. 내 생일도 아닌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빈다. 


'선물이 허세가 되지 않으려면 지난 4년이 값져야 해. 아무 날도 아닌데 "생각나서 샀어요" 라며 턱턱 선물을 내놓게 되기를, 그걸 받는 사람의 마음 역시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수 있기를...'


그전엔 정말이지 기념일 따위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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