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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24. 2023

브런치 제안이 꼭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

[지잉~] 어제 오후쯤 브런치 알림이 울렸다. 일상적인 라이킷 알림인가 싶어 잊고 있다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브런치 제안 알림이었다. 그동안 브런치 제안으로 몇 차례 흥미롭고 금전적으로도 쏠쏠한 경험을 했던지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메일을 열어 보았다.  


제안 내용은 모 인사컨설팅 기업에서 발행하는 정기 레터에 필진으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 필진 참여 요청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의 결과가 썩 유쾌하지 않았더지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몽글몽글 차올랐던 기대감이 한풀 꺾이면서 오히려 차분해졌다.


첫 번째 요청을 받았던 건 올해 초인데, 이름난 대기업 내부 웹진에 내 글을 연재해 주는 것은 물론 쏠쏠한 원고료도 지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무려 6개월간이나 정기적 수입이 생기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조급함에 그 자리에서 덥석 수락을 해버리고 말았지 뭔가? 아이고 이 무명 글쟁이의 글을 연재해 주시고 고료까지 주신다굽쇼? 언감생심. 굽신굽신. 


제안을 했던 담당자는 최종 승인을 위해 프로필, 졸업증명서, 경력증명서 등 이런저런 자료들을 요청했다. '이야. 이거 뭐 이런 자료들까지 달라고 할 정도면 거의 확정이겠지?' 싶어 그날 하루를 다 쓰면서까지 정성스레 자료들을 준비해 송부하고는 최종 통보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설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니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퇴사 후 수년간의 경험으로 어떤 제안이든 일단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결과통보가 없으면 긍정적이지 않은 시그널이라는 진리를 몸으로 체험한 바, 보통 빨리 잡고 싶은 사람이라면 서류 검토 하루 이틀 만에도 연락이 온다. 면접이든, 원고투고든 분야에 상관없이 마찬가지다. 촉이 왔다. 최종 승인을 받지 못했구나.


뭐 좋다. 의사결정권자의 마음에 쏙 들만큼의 능력자가 아니었다는 데 어떻게 하겠는가? 이견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결과에 대한 통보라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일주일이 지나고 그다음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안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미 포기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상태였지만 불쑥불쑥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가타부타 어떻게 되었다는 연락이라도 줘야 할 거 아닌가? 그게 기본 예의 아닌가? 


먼저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고? 이미 결론이 난 상황에 물어본다 한들 결과가 달라질 리도 없을 테고 이미 그동안의 경험으로 빠른 포기가 이롭다는 사실을 배운 사람 아니던가? 배운 사람답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잠시 부풀었던 기대를 접고 결과를 쿨하게 받아들인 마당에 구질구질 먼저 연락을 해서 어떻게 된 겁니까? 묻지도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번 제안은 또 어떨까? 기대반 의심반으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이고. 이번엔 제안 자체부터 문제다. 필진 참여 참  좋은데, 조건이 기가 막히다. 월 2회 글을 게재하고 작가가 받는 특전이란 게 컨설팅사 콘텐츠 3개월 무료 이용권? 오프라인 교육 1회 참여권? 자사 회원 2만 명에게 개인 채널 홍보?


한마디로 날로 먹겠다는 말 아닌가? 헛웃음이 났다. 아무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 글쟁이 데다 브런치에 무료 글을 올리고 있는 처지라 한들, 이미 책도 두 권을 내고 상업적인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상 공짜로 글을 달라는 요청이라니.


내 자존심은 그렇다 치고, 그 업체에 묻고 싶은 것은


돈 한 푼의 값어치도 지불할 생각이 없는 사람의 글을 자신들의 공식 레터에 싣는 용기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 레터 자체가 그 정도의 중요성 밖에 갖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저 글을 채우기에 급급해 이 정도 수준의 글만으로도 괜찮다는 건가? 하려면 제대로 하고 말려면 말지 이 뜨뜨미지근한 이도저도 아닌 레터는 왜 발행하려는 걸까?


안다. 나는 아직 이름만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유명인사도 아니고,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전문가도 아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제안을 했다는 것은 이곳에 쓰인 내 글이 공식 레터에 올라갔을 때 최소한 망신을 당할 수준의 글은 아니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 아니었나? 


고작 돈 한 푼 지불할 생각이 없는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 글들이 모여 만들어진 레터를 발행해 본 들,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끼칠 수 있을까? 분명 그 회사에도 장기적으로 좋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무언가를 누군가에 요청할 때의 기본적인 상도덕은 크건 작건 그 값어치를 합리적으로 책정해 정당하게 지급하고 쓰는 것이다.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번 제안은 지극히 불쾌하고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요청임에 틀림없다. '네 글의 값어치는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읽혔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특전조차 언감생심 감사하게 생각하며 기회로 여기는 작가 지망생들도 있겠지만, 나는 자존심을 세우련다. 더 나은 글을 써 당당히 그 값어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작가가 먼저 되련다. 


우리,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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