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장. 職격_ Overall
"무슨 일 하세요?“
”S그룹 다닙니다“
조용히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민다
”아이고 좋은데 다니시네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누구나 다 아는 유명 대기업 로고가 선명히 박힌 명함은 그 자체로 나를 설명해 주고도 남지. 나 역시 그룹 배지를 정장 옷깃에 달고 처음 출근하던 날, 명함과 사원증을 지급받았던 순간을 잊지 못해
요즘 시대에 평생직장은 사라진 지 오래라지만, 일단 집단에 소속되면 안주하려는 습성은 인간의 본성이야. 하물며 대기업이라면 오죽할까? 업종, 직무, 업무난이도, 통근거리 따위 외적 조건을 불문하고 일단 붙고 보면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유지하려는 욕구는 극대화될 수밖에. 물론 1년, 3년, 5년 단위로 이직 충동을 겪기도 하고 실제 이직을 실행에 옮기거나 아예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이를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기준 평균 퇴사율(Turn over rate)은 10%가 채 되지 않고, 중소기업의 경우도 15%를 넘지 않아
통계 속성상 IMF와 같은 대형 이슈가 있지 않는 한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는 점을 감안하면 요즘 세대는 밥 먹듯 회사를 그만둔다 둥, 대퇴사 시대라는 둥 항간의 속설은 어딘가 과장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평생직장 말고 평생직업'을 외치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추세라지만, 한 분야의 온전한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직장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어. 이곳저곳에서 일해본 경험만으로 전문성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야.
이들 역시 실은 안정적 환경에서 충분한 처우를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소속회사의 네임밸류도 괜찮다면, 그것을 최대한 누리며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을지도 몰라.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분명 끝이 보이지만 당분간은 Safety zone이 보장되는 탄탄한 직장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지
문제는 이 Safety zone이 주는 안정감이 '양날의 검'이라는데 있어. 모든 생활패턴이 마치 블랙홀처럼 조직에 맞춰지면서 개인이 집단화되고 급기야 부품화되기 쉽다는 점은 치명적이야. S그룹 L대리, L그룹 K과장 따위 명함값에 매몰되면 마케터 이 OO, 브랜드 전문가 김 OO, EX디자이너 박 OO 같은 개인 정체성은 자연히 옅어지고 말아
거기에 어느 회사든 마치 지박령처럼 부유하는 '사내정치'의 존재는 온전히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순진한' 사람들을 좌절로 몰아넣는 덫과도 같아. 실무능력은 개뿔도 없으면서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데만 능한 '꾼'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승승장구하는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지. 대다수는 곧 포기하거나 순응하고 말아
전통적인 대기업집단일수록 조직 내 안정감은 높은 대신 집단주의가 강해. 나 자신의 정체성, 주체성, 유니크함을 내세웠다간 '우리'라는 명분으로 정 맞기 십상이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타협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를 죽이고 숙이고 다듬어 뾰족한 부분은 모두 깎여나가고 마침내 어디 하나 모난데 없는 둥글둥글한 자갈의 형태로 수렴돼
그 끝에 '제너럴리스트'가 있어. 두루두루 잘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 밑천이 드러나고야 마는 시대의 변종. 나중에 여유가 되면 그때 자기계발도 하고 내 아이덴티티도 되찾아야지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그땐 더 힘들어.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기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무엇보다 내 뾰족함, 야생성, 주체성을 통째로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야
그 사이 30대를 지나 40대에 이르면, 문득 옆자리 49세 K부장의 '현재'가 눈에 들어와. 한때 에이스로 날렸던 K부장은 사내 임원 경쟁에서 도태된 지 오래야. 6년째 팀장이지만 그마저도 내년엔 면직책 된다는 소문이 파다해. 출근하면 이직 공고를 검색하거나 지게차 자격증 정보 따위를 찾아보며 소일해. 올해 상무로 임명된 L은 그룹 최초의 30대 임원이야. K부장의 10년 학교 후배이기도 해
그를 보면 내 앞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지만 그렇다고 뛰쳐나가기도 이미 늦었어. 이직을 해봤자 여기보다 더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무엇보다 관계든 업무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공포가 커
언젠가 끝이 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이제야 실감이 나. 가늘고 길게 버텨본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한계야. 그런데 그다음은? 요즘 기대 수명이 80년을 훌쩍 넘으니 거의 30년 가까이 남은 인생 후반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뒤늦게 내 전문성, 이름값은 어느 정도인가? 밖으로 나갔을 때 경쟁력은 있을까? 스스로를 돌아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손에 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해. 내 분야를 정해 경쟁력 있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보다 Safety zone에 안주해 누군가 시킨 일을 수동적으로 처리하고 관계를 맺는 일에 여념이 없었어. 그 결과 실력이라는 진짜 성장이 멈춘 '사회적 난쟁이'가 되고 말았지만 누구 탓을 하겠어?
명함값을 벗고 이름값만으로 광야에 서보면 알게 돼
나 정도의 스펙과 경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시장에 널렸다는 사실을. S사 이 차장, L사 이 부장은 명함 하나로 나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했지만 회사이름과 직책을 뗀 자연인 이 OO는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신입의 직격 그 세 번째는 바로 직職,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야. 職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나뉘어. 나는 강연을 할 때 "'조직과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글과 강연'이라는 하드웨어에 담는 일을 합니다"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
소프트웨어는 핵심 콘텐츠를 포함한 보이지 않는 자산이야.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 정보, 인사이트 그리고 그것들을 유지하고 감내할 내적 마인드를 총칭하지. 하드웨어는 그렇게 갖춰진 소프트웨어를 구동시키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도구와 방법론이야. 이 두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갖출 때 우리는 비로소 職격에 이를 수 있어
소프트웨어
우선 내 분야부터 찾아야 해. 이 일이라면 평생 해도 재미있겠다 싶은 일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급해. 지금 맡고 있는 일, 혹은 맡게 될 일과 내 적성이 일치하는지부터 살펴보라고. 어차피 일반 회사의 일은 다 거기서 거기야.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분야랄 게 없어. 전공이나 입사 전 희망부서에 배치되면 다행이지만 막상 일을 해보면 알게 돼. 시간을 들여 숙련에 이르면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라는 사실을
스스로 내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이 부서에서 3년, 저부서에서 3년 이리저리 떠돌다 이도저도 아닌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십상이야. '나는 뭘 잘하는가?' '뭘 할 때 즐거운가? '언제 성취감을 느끼는가?' 끊임없이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그 안에서 스스로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정의하고 그에 맞는 내 분야를 찾아내는 일이 먼저야
그다음 의도적으로 시간을 들여 공부해. '1만 시간의 법칙'을 들어봤겠지? 주의해야 할 건 누군가 지시한 수동적인 업무 수행만으로 쌓인 시간은 1만 시간이 아니라 2만 시간이라도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야. 성장은 완만한 우상향 곡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이뤄지는데 때론 후퇴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전을 이루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이야
일은 그 자체로 수련의 장이 되어야 해.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회사의 시간이 무의미한 낭비로 귀결되어선 답이 없어. 혹여 내 분야가 아닌 일을 맡더라도 그 과정에서 교집합을 찾아 의도적으로 연결하는 노력은 끊임없어야 해. 스스로 On the Job training을 수행하는 셈이지. 멘토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야. 어디서 찾냐고? 내 분야라는 안테나를 꼿꼿이 세울 수만 있다면, 여기저기 눈에 띌 거야. 하다 못해 떨어지는 낙엽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어
전문성을 키워가는데 지름길이란 없어. 언제든 슬럼프가 오기도 하고 좌절을 겪기도 하니까. 늘 좋을 순 없지. 의욕과 욕망, 노력의 크기가 클수록 한 번씩 몰아닥치는 좌절감을 이겨낼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야말로 성장을 위한 필요조건이야.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해
마지막은 집중력이야. 한 시간을 쓰고도 1.5시간의 효과를 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0.5시간 밖에 효율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이게 평생 쌓여봐. 그 격차는 어마어마해질 거야. 집중력의 핵심은 원씽 One thing이야. 딱 한 가지만 하는 것. 인간은 멀티플레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야.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믿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담아낼 실체(도구, 방법론 등)가 없다면 무용지물이야
첫 번째 도구는 '리터러시'야. 글을 읽고 쓰는 능력 말이야. 우리는 평생에 걸쳐 사실상 '리터러시'로 평가받아왔어. 초등학생 시절 그림일기 숙제부터 대학 때의 리포트, 회사 보고서까지 온통 '리터러시'가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 그런데 그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야. 글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사람치고 일을 포함해 모든 영역에서 잘 해내는 사람을 못 봤어. 하버드 등 세계최고의 대학 커리큘럼에 '글쓰기'가 필수 과목인 이유야
그다음은 일을 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체크할 '피드백 툴'이 필요해. 바로 TASK 야
Talent 그 일에 자질, 적성이 있는가? 를 살피는 일이야
Attitude 일을 할 때 열정, 책임감이 있는가? 를 살피는 일이야
Skill 일에 필요한 도구, 방법론에 숙련되어 있는가? 를 살피는 일이야
Knowledge 일에 필요한 정보, 트렌드를 끊임없이 익히고 있는가? 를 살피는 일이야
일을 잘하고 싶다면 이 네 가지 요소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하나하나 스스로를 체크해 봐. 보일 거야
건강한 몸과 마음이야말로 하드웨어의 기본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싶겠지만 야근이다 회식이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면 망각하기 십상이야. 의식적으로 시간을 내 몸관리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어느 순간 건강검진에서 노란불, 빨간불로 도배된 결과지를 손에 쥐게 될지 몰라. 건강에 관한 청구서는 오직 내 이름 앞으로만 떨어지게 되어 있어
회식 때마다 소맥을 글라스에 부어 먹으라고 강요하던 K부장도 '어이구 그러게 젊었을 때 관리 좀 하지 그랬어? 쯧쯧' 이렇게 발 빼기 마련이야. 적당히 맺고 끊으며 스스로를 챙기는 습관을 가지라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결코 잊지 마
마지막은 하드웨어의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채널이야. 내가 가진 것을 알리고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트래픽'을 확보할 채널은 반드시 필요해. 단, 내 성향에 맞고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채널이어야 해. 글이 좋다면 '브런치' 사진과 이미지가 편하다면 '인스타' 영상, 스토리 기획이 좋다면 '유튜브'야
신입시절인 지금부터 시작한다면, 적어도 3~4년 후 나 자신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하고 정제된 상품성을 갖춘 퍼스널 브랜드를 어느 정도 완성할 수 있으리라 확신해. 그보다 더 귀한 자산은 없어. 꾸준함이 생명이야
부질없는 명함값에 도취돼 내가 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길인 '이름값'이 묻히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