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의대 열풍도 그렇지만, 천진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꿈을 '직업'으로 말하는 현실이 어쩐지 기괴하다는 생각을 그때는 못했지
나 역시도 '꿈=직업'이라는 공식에 별다른 이견은 없었어
"나는 돕는 일을 좋아하니까 구름이 되어 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비를 뿌려줄래요"
언젠가 '백년대계-교육'을 주제로 한 다큐에 출연한 북유럽 아이들의 꿈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반에서 꿈을 직업으로 이야기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
기후학자가 되거나, 그린피스에 들어가거나,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일하거나, 멋진 요리를 만드는 셰프가 되는 일 모두가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될 테지. 어떤 직업을 택하든 높은 확률로 자신의 일에 만족할 뿐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명감으로 '즐겁고 보람차게' 일할 수 있을 거야
극한의 경쟁을 이겨내고 상위 몇%에 안에 들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는 것이 유일한 일생의 목표가 된 우리 아이들과 선명히 대비됐어. 물론 그런 삶도 스스로 원했다면 나쁠 건 없어. 인생에 정답은 없는 거니까
다만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 누구를 위한 삶인지, 내 꿈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지, 그 삶을 어떻게 손수 만들어 갈 수 있을지 따위가치관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기도 전에 타인의 대본에 따라 강요되는 무한경쟁의 삶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진정으로 배운 건 무엇이었을까? 싶었어
운 좋게 극한 경쟁을 이겨내고 원하던 '직업'을 손에 넣었더라도 내 꿈이 완성됐다고 느낄까? 그럼 그다음은 또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했지
"왜 의사가 되려고 했어요?"
"돈 많이 벌잖아요.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입시를 마치고 이제 막 신입생이 된 의대생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 솔직한 속마음일 테지. 뭐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인류애적 마음가짐도 있겠지만 온 힘을 다 바쳐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 되려는 이유는 사실 뻔해
정말로 그뿐이라면, 글쎄? 더 많은 돈,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위해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강박 속에 경쟁은 끝도 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이런 현상은 지성의 요람이라는 일반대학에서도 다를 바 없어. 전공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고 오직 '취업'을 위한 거대한 학원이 돼버린 지 오래지. 학생들도 사실상 점수에 맞추거나 사회적 인식에 따라 전공을 선택했을 뿐이야. 학점, 어학, 봉사활동, 해외연수, 인턴경험 등 정형화된 스펙을 갖추기 위해 대학의 낭만이나 학문의 다양성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야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이제 현실이 됐어. 취업이 안된다는 이유로 냉대받다 못해 아예 폐과 되는 촌극도 벌어져. 한국 사회의 몰개성, 획일화, 천박한 자본주의가 짬뽕된 상징적 사건이 아닐 수 없어
우리는 왜 사는가? 왜 혼자서는 살 수 없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 본질적, 철학적 질문은 일찌감치 제쳐둔 지 오래고, 오직 점수를 따고 스펙에 맞춰 '취업'에 적합한 부품형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은 차라리 가련하기까지 해
불확실성, AI의 시대에 오히려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더욱 높아지는 서구 선진국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속페달을 밟는 행보를 바라보는 심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어
그렇게 스펙을 쌓고 회사에 들어온들, 끝이 아니야.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될 뿐. 하나의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있고 평생 극한 경쟁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어. 그런 상황에 내가 원하고 꿈꾸던 나만의 분야 field를 찾고 그 안에서 더 고차원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일한다는 건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야
우리가 '내 분야 field'를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꿈을 고작 '직업'으로 한정하고 타인의 대본Script에 복종하도록 가스라이팅 해온 '사회적 경직성' 때문인지도 몰라
곤도 마리에는 일본의 평범한 주부였어. 그녀는 '정리의 달인'으로 알려지면서 일약 스타가 됐지. 일본뿐아니라 미국까지 진출해 [곤도 마리에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제목의 넷플릭스 시리즈를찍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어. 귀찮은 집안일 정도로 여기던 '정리'가 하나의 '정리 컨설턴트'라는 사업 영역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곤도 마리에는 집안 정리를 단순 노동으로만 보지는 않았어. 자신만의 방법으로 착착 정리된 집안을 보면서 오히려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지. 적성에 맞았던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노하우가 쌓였고 방법론은 체계적이 됐지.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의 정리를 대신해주거나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하면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고, 요청이 많아지자 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은 점점 커졌어. 이전에 없던 하나의 field, 장르를 스스로 창조해 낸 셈이야
나 역시 일찌감치 나만의 field를 정했지. 바로 '조직문화'였어. 17년의 회사생활동안 우연찮게 HRM, 육성, 조직문화 업무 등 범 HR업무만을 맡게 됐고 그중에서도 조직문화업무에 매력을 느꼈지. 조직과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원리를 탐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적용해 보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어. 뭔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고 이것저것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 적성과도 잘 맞는다 생각했지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어. 사실상 성공보다는 실패, 좌절의 경험이 더 많았으니까. '조직문화가 중요하다' 말은 하지만 실제 경영진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당장 기업들의 조직도만 봐도 답은 나와있어. 대기업이나 일부 잘 나가는 스타트업 몇 곳을 제외하고는 조직문화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립된 조직도 없고 필요하면 인사, 총무 담당자가 겸업하는 곳들이 대부분이지. 기업은 중요한 기능을 절대로 겸업의 형태로두지 않아
17년의 회사생활을 마감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야. 회사의 경영실적이 수년째 악화일로였던 탓이 결정적이었지만 침몰하는 조직에서 조직문화 책임자라는 일개 개인의 역할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해
퇴사 후 4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어. 그래서 조직문화라는 필드의 전문가가 되었느냐고? 글쎄. 여전히 그 여정은 진행 중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곤도마리에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야. 고작 책 두 권을 냈고 몇몇 기업, 공공기관의 요청으로 강연도 진행하는 등 작은 성과는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해
다만 평생을 몸담을 내 분야field를 찾아냈고, 매일 조금씩 그 결과물이 쌓여가고, 언젠가 스스로 납득할만한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믿음만은 굳건해.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동안 무엇보다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 후회가 있다면, 왜 조금 더 일찍 결단하지 못했을까 라는 마음뿐이야
'회사원'이라는 필드는 없는 거야
처음부터 꿈이 회사원인 사람은 드물 거야. 회사원의 끝판왕은 뭘까? 임원? 사장? 뭐 그런 지위를 꿈꾸며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도 분명 있겠지만 일하다 보면 알게 돼. 회사 조직에서의 성공이란 온전히 실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최소 십수 년의 불확실성을 견디며 사람 관계 등 업무 외 영역까지를 포함해 우연과 행운 혹은 불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통제불가능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회사원'이라는 분야field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분야field가 되려면 그 분야의 성공한 권위자들이 존재하고 그 성공에 이르게 된 루트와 법칙, 패턴이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어야 해. 그 과정을 거쳐 일정한 역량과 자격을 획득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그 분야의 '공식인증'까지 부여되어야 하지
'글'이라는 필드field 그중에서도 소설의 영역을 보자고. 국문학, 문예창작 등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학습하는 학문분야가 존재하고 '습작'이라는 과정을 거쳐 '등단'이라는 공인 절차가 존재해. 그 관문을 넘으면 '신인작가'라는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부여받고 작품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돼
'마케팅'이라는 필드field는 어떨까? 경영학이라는 학문 분야 내에 마케팅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커리큘럼이 따로 존재하지. 유명 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고 마케팅 방법론을 정립해 책을 내거나, 채널을 만들어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해 유명해진 이들은 당당히 '마케팅' 전문가로 대접받아. 일반회사에서 회사원으로서 마케팅 업무를 맛본 이들이 스스로를 마케터라고 부르기 부족한 이유야
착각하지 말자고 '회사원'이라는 필드는 존재하지 않아. 대다수의 그냥 '회사원'은 재직기간 동안만큼은 전체의 부품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오롯이 내 이름으로, 어떤 분야의 실력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엔 한없이 부족한 타이틀일 뿐이야. 행여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 하나의 '필드'로 알고 있었던 세계는 마치 허상같이 붕괴되고 말 거야. 대기업 소속이라도 다를 바 없어
물론 일반회사에도 반전문직들이 있을 수는 있어. 요즘 수요가 딸린다는 코딩, 프로그래머의 경우 엄연히 실력 기반으로 평가, 대우를 받고 여차하면 이직도 자유로울 거야. 디자이너들의 경우도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내 실력이 이렇다 증명할 수 있지. 귄위있는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까지 했다면 말해 뭐 해?
잊지마. 회사원, 사무직은 직업이 아니야
내 분야라는 안테나
‘바더-마인호프 현상(Baader-Meinhof Phenomenon)’은 뇌의 ‘선택적 주의’와 ‘확증 바이어스’가 작용해 일어나는 인지현상을 말해. 한마디로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현상을 뜻하지. 자식이 군에 입대하면 길거리에 군인만 보이고, 사려고 마음먹은 차종이 생기면 길거리에 그 차만 보이는 이치야
내 분야가 명확해졌다는 건 일종의 안테나가 세워진다는 뜻이야. 세상의 수많은 정보들 중에 그와 관련한 정보만이 마치 자석에 달라붙듯 선택적으로 수집되는 마술이지. 자연스레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져.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내 분야와 연결해 비로소 '가치 있는' 연습이 가능해져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경험을 쌓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제너럴리스트'야 말로 실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수박 겉핥기식 직장인을 양산하는 기만적 용어라고 생각해
신입일수록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 필드를 명확히 정하고 끊임없이 주위에 어필해야 해.
"직장인이면 회사에서 시키면 다 해야지! 회사가 자아실현하는 곳이냐?"라고 누군가 일갈한다면 무시해. 그 사람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아
물론 현실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들만 선택적으로 맡을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 쿄세라 창업자이자 경영구루 이나모리 가즈오는 "직장인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맡게 될 확률은 1/1000에 불과하다"라고 까지 했지
이때 필요한 게 바로 내 분야field라는 안테나야. 어떤 일을 맡든 이 안테나만 선명하다면 내가 원하는 분야의 일과그다지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서 그 연관성을 찾아내 의도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가려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