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기도 하고 듣기에 따라 긍정적 표현 같지만, 직장인의 언어라면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니야
알다시피 회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야. 물론 그 과정에서 고용이라던지, 봉사라던지 여러 사회적 공헌도 하지만 기업의 본질은 시장의 무한경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 영구히 존속 발전하는 일이지
"회사는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조직내부 역시 대체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성원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지. 그 행태는 천차만별이라 일반화하고 범주화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관계지향'이냐 '과업지향'이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 같아
'과업지향'은 업무자체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부류야. 무엇보다 일의 과정과 완결성에 중점을 두고 성과와 실력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처우도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편이지
'관계지향'은 조직 내 역학관계에 더 열을 올리는 부류야. 누가 힘이 센가? 실세인가? 따위에 민감해서 공적, 사적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관심이 많지. 말하자면 '사내정치'에 특화된 사람들이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어.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적당히 일에 몰입하면서도 은근히 조직 내 힘겨루기에도 관심이 많지
문제는 양극단에 놓인 사람들이야. 지나치게 의도적이거나 지나치게 의도적이지 않거나
관계지향, 그러니까 사내 정치에 올인한 사람은 모 아니면 도야. 이 조직에서 누군가의 눈에 들어 줄을 타지 않는 이상 실력은 제자리걸음일 테니 이직도 힘들어. 거의 모든 행동과 말에 의도가 있고 상대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 그래서 더 이 악물고 악착같이 권력자를 찾아 이와 잇몸이 된 듯 굴어서 함께 승승장구하거나 버림받거나 둘 중 하나야
과업지향의 극단에 위치한 사람들 역시 모 아니면 도이긴 마찬가지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 사내정치 따위 관심도 없고 일에만 매몰된 탓에 조직 전체가 나아가려는 맥락도 못 짚고 눈치도 없이 고집만 센 독불장군이 되기 십상이거든. 자기애가 과해 때로는 유유자적 외로운 늑대라고 여기지만 조직의 시선은 그다지 곱진 않아. 그 분야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내는 진짜 전문가 수준이라면 몰라도 회사라는 조직이 개인 한 사람을 그 정도로 키워주지도 않지
부끄럽지만 내가 바로 그런 부류였어. 17년 가까이 범 HR분야에서만 일했고 회사의 조직문화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올라서도 '진정성'과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런 종류의 일일수록 조직 내 힘의 구도라던지, 사람관계라던지, 정보가 흐르는 메커니즘 따위를 제대로 파악해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어. 자연히 일에 대한 진정성은 몰라도 실력은 제자리에 머물렀지.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안전지대에 머물러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당시에는 그저 내 진정성을 회사가 몰라준다고만 여겼어. 우물 안 개구리였지
반면 C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어. 비슷한 시기에 경력직으로 한 팀에 입사한 탓에 동기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지. C는 틈만 나면 이런 말을 했어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누가 힘을 갖고 있는지 잘 봐야 돼. 누가 실세고..누가 거품인지..."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어
"그런 게 어딨나? 그저 자기 일만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그만이지"
C는 그런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
C는 인사기획, 그중에서도 노무 담당자였는데 임단협 등 각종 협상 전략을 짜는 일을 '작전'이라고 불렀어. 그 일에 꽤나 유능했지. 대표적인 업적? 은 그룹 계열사 최초로 연공제의 상징인 '호봉제'를 없앤 일이었어. 노조가 왜 합의했는지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구성원들은 가만있어도 매년 급여가 물가 상승률만큼 오르는 '호봉제'폐지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반대급부로 지급받은 '목돈' 수백만 원에 기뻐할 뿐이었지. '최초'라는 의미는 꽤나 컸어. 그룹전체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거의 모든 계열사가 '호봉제' 폐지에 열을 올렸으니 말이야. 길을 열어준 셈이지
C의 놀라운 점은 거의 모든 사적, 공적 관계를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만들고 유지한다는 점이었어. 하다못해 술자리 약속을 잡을 때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는지 눈을 굴리며 계산하는 사람이었지. 협상 테이블에서는 핏대를 올리고 삿대질하던 노조위원장과도 평시에는 유착관계가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친밀함을 과시했어. 심지어 그룹 내 역학 관계까지 안테나를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 '부지런함'까지 갖췄지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
회사의 제도를 만들거나 개선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의도야. 왜 그렇게 했는가? '작전'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를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혹여 사측의 이익에만 치중하거나 그 일을 행하는 측의 일방적 성과로 향한다면 피해를 보는 건 구성원 전체일 테니 말이야
C의 '작전' 결과가 누구를, 무엇을 향했는가?를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지만, 철저히 회사 측의 입장에서 경영진의 의도를 정확히 관철시키는 데 탁월하다는 인정과 그에 대한 보상을 '착실히' 받은 것만큼은 분명해
반면 당시의 나는 '순진' 그 자체였지. 그 연차씩이나 돼서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경영진을 움직이게 하는 '킹핀 king pin' 인지 정무적 감각도 없이 그저 책에나 나올 현학적인 이론을 근거로 조직문화 캠페인, 워크숍, 교육 계획 따위 일련의 일을 들고 와 "이건 꼭 해야 하는 겁니다" 목청이나 높여댔으니 두고두고 '이불킥'할 일이야
'그래 열심히 해봐라. 그거 한다고 회사가 바뀌나'
C의 나를 향한 묘한 미소는 '비웃음' 아니었을까?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
영화 [달콤한 인생]의 능력 있는 해결사 선우(이병헌 분)는 보스(김영철 분)의 오른팔이야. 어느 날 선우는 보스로부터 외국 출장을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 어린 애인을 돌봐주라는 지시를 받아. 보스의 애인(신민아 분)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던 중 다른 남자를 만나는 현장을 포착하고 보스에게 알리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마음이 흔들려 없던 일로 해 줘.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보스는 선우에게 분노하고 보복을 지시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집단린치를 당한 후 생매장당하기 직전, 보스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너 대체 왜 그랬냐?
"그렇게 하면 모두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
질문의 의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사실 그녀에게 끌렸다'라는 진짜 이유를 대지 못한 선우는 결국 최종적으로 버림을 받아. 서로에 대한 끈이 꽤나 튼튼하다고 믿었던 선우가 보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대가는 정말로 컸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입장이 뒤바뀐 채 똑같은 대사가 이어지는데, 이 장면에서도 서로의 의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는 Sad ending으로 끝이 나. 의도를 무기로 쓰다 lose-lose 한 셈이지
계산적인 사람이 돼라
이원흥은 농심기획 대표이자 카피라이터야. 자신의 책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에서 '계산적인 사람이 돼라'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응? 싶었지. 얄팍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속된 욕심쟁이 이미지에 가까웠으니까
이원흥의 딸이 고교생일 때의 일이야. 어느 날 딸은 가정통신문을 받아와 제 아빠에게 건네줬는데 가정에서 학교로 보내는 메시지를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이 메시지를 가장 처음 보는 사람이 누굴까?'
그건 바로 딸이었어
'아빠가 나에 대해 어떻게 써줬을까? 궁금해서 먼저 읽어보겠지'
그래서 계산을 했다는 거야. 아빠의 사랑과 믿음이 전해지도록 딸을 위한 메시지를 쓰자라고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려는 의도로 자신의 행동과 상대의 반응을 계산할 줄 아는 '계산적인 사람'은 바로 그 일화에서 나온 거였어. '아~그런 의미라면...' 고개를 끄덕였지.이 역시 나와 상대의 '의도'를 읽거나 예상할 줄 아는 공감능력에서 비롯돼. 의도의 '올바른 도구화'인 셈이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서로 잘되자는 의미의 계산적 행동에도 '의도'야 말로 건강한 관계를 위한 전략임에 틀림없어
당해도 알고 당하라고
직장에서 '순진'하다는 평판은 상대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맥락을 볼 줄 모른다는 '낙인'이기도 해. 이 말은 곧 '전략적 사고'가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나와 상대의 의도를 어떻게 다루느냐? 가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야
왜 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회사 업무 특성상, 일의 의도를정확히 포착해 적절히 대응하는 일은 실로 중요한 역량이야.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고 서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견주고 맞춰가는 협의를 할 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의도에 투명하지 않고 불순한 무언가가 섞였을 때 그것을 포착해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이야
내가 순수하고 진정성이 있으니까 상대도 그렇게 나를 대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아 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는 '빈틈'을 포착한 순간, 자신의 의도는 교묘히 숨기고 그 빈 틈을 파고들어 상대를 기만하고 조종하고 반칙을 써서라도 제 이익을 챙기려는 '사냥꾼'들은 널렸으니까
상대의 '무기화'된 의도를 파악해 '이 사람이 내 의도를 눈치챘구나'를 눈치채게 만들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데 무엇보다 유용해
그런 의미에서 의도는 '도끼'야. 얼마나 좋은 도끼를 가졌느냐? 가 먼저고, 그다음은 그 도끼를 '무기'로 쓰느냐? 나무를 베는 '도구'로 쓰느냐? 의 문제로 이어져. 좋은 도끼를 가졌지만 그것을 무기로 쓰려는 '사냥꾼'이 내 근처에 있다면 나 역시 좋은 도끼를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전략적 사고, 계산적 사고란 무기가 아닌 도구로서 '의도'를 이해하고 바르게 활용하는 지적작용이야. 나 하나를 위해 모두를 희생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나도 좋고 상대도 좋은 'Win-Win게임'을 위한 것 이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