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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30. 2024

[신입의 직격] 극혐을 극혐해

Ⅱ장. 織격_ 공감관리 2_ 다양성

"OO이 정말 극혐이야!"

엄마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탄 꼬마 아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잠시 정적이 돌았어

"그런 말 하면 못써"

엄마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왜 그 말을 쓰면 안 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지. 아이의 화가 잔뜩 난듯한 표정과 말투는 '극혐'이 뜻하는 바를 대충 알고 있음이 분명했어. OO이라는 친구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고운 입에서 '극단적으로 혐오스럽다'라는 험한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을까?


요즘 들어 '혐오'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된 듯 보여. 남혐, 여혐, 성소수자혐, 세대혐을 넘어 심지어 어느 동네, 어떤 아파트에 사느냐 를 두고도 조롱과 차별, 혐오의 대상화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이야. 마치 온갖 혐오를 부추기고 갈라 치기를 유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처럼


"똑똑하긴 한데, 하나 같이 말 잘 듣는 도련님 스타일들만 들어온단 말이야"

20여 년 전 S그룹 재직 당시 함께 그룹공채를 진행했던 메이저 계열사 채용담당자는 이렇게 푸념하곤 했어 

"뭔가 좀 튄다 싶은 애들도 막상 뽑아놓으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버리거나, 남더라도 기존 사람들처럼 돼버린단 말이지"

사실상 조직의 획일성을 고백하는 목소리였어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글쎄, 솔직히 회의적이야. 아니, 20년이 흘렀지만 전혀 바뀌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해. '학벌중심' 엘리트주의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이야. 머리 좋은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선입견은 신앙에 가까워. 이런 믿음이 수십 년 기업문화를 관통하는 동안 '가슴은 차갑지만 머리는 뜨거운' 동류집단이 대거 유입되고 요소요소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과 닮은 클론을 양산해 조직의 획일화를 가속화한다는 합리적 의심. 우리 기업들이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에서는 기껏해야 '카피캣'에 머무는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해


더 큰 문제는 이런 본능적 습성을 누군가 이용하고 증폭하려 한다는 점이야. 다름을 틀림으로, 경계와 위협의 본성을 자극해 혐오를 부추기고 내편, 네 편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하려는 시도는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음험한 세력에 의해 집요하게 획책되어 왔어. 그 과정을 통해 결국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획일적 사회가 된다 한들 그곳은 정말 우리가 바라던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


획일화는 자칫 전체주의를 부르고 그 끝단에 '홀로코스트' 같은 끔찍한 비극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달마과장>이라는 웹툰에 이런 내용이 있어

회사비용을 아낀답시고 엘리베이터 사용을 제한하자 구성원들이 반발해. 보고 받은 사장은 이렇게 말해 


예상대로 세대별 분열이 일어나자 두 번째 조치로 쐐기를 박아


이제는 남녀끼리 싸워. 이 보고를 전해 들은 사장은 축배를 들어


그저 만화 속 이야기라면 웃어넘기겠지만, 어쩐지 현실이 더한 것 같다면 과장일까?


인간의 제1 본능은 '생존'이야. 내 안전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미지의 존재'를 경계하는 습성은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진화의 산물에 가까워. 들판에는 맹수가 득실거리고 어둠이 내린 산골짜기 저 편에선 언제 낯선 존재들이 무기를 들고 쳐들어올지 모르는 야만의 시대에 '다름'은 최선의 경계 신호였을 거야


시각과 청각은 피부색과 말, 혹은 말씨의 차이 같은 것으로 '다름'을 인지하고 편도체는 나에게 해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시적으로 판단하도록 진화해 왔어. 이전의 정보가 없다면 우리와 온전히 다른 그들을 '침입자'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다름의 세력이 힘이 없고 약하다는 것을 알아채면 오히려 공격성을 띄기도 했을 테고 


발달심리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6~7세에 이미 인종과 성별에 따라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생후 9개월의 영아도 가장 많이 접한 인종이나 피부색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해. 사회인지 Social cognition는 대인관계나 사회적응을 위한 행동을 결정하는 내재적 과정에서 습득된 타인의 감정, 의도,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우리 편(내집단) 구성원에게는 편안함과 친밀함을, 다른 편(외집단) 구성원에게는 불편함과 적대의식을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결국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 가르기 습성은 타고난 본성과 사회적 학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말이야 이런 습성이 요즘 시대에도 유효할까? 문명화가 된 이래 인류는 더 이상 들판을 전전하지 않고 맹수의 위협에서도 벗어났고 호시탐탐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식량을 노리는 미지의 적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 자연히 인간의 본성에 잠재되어 있는 '다름'에 대한 경계, 편향과 편견,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 따위 본성은 그 생래적 필요성을 상실한 지 오래야 


사회적으로도 표면적인 변화는 생겼어. 미국, 유럽을 포함한 서방 선진국들은 '인종차별'을 포함한 각종 차별과 혐오를 '범죄'로 인식하고 제재하고 있어. 기술의 발달로 거리, 언어, 국경 등 물리적 경계가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전지구를 대상으로 한 사업들이 속속 전개되면서 국가와 인종, 문화권의 교류가 급격히 확대된 마당에 '다름'으로 인한 경계와 편향, 차별은 오히려 일의 진척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로 인식 전환되고 있어


거기에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이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진리 또한 깨닫게 됐지 


Better 보다 Differ 

헨리 포드가 대중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더니 "더 빠른 마차"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수준으로는 혁신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아. 최초의 자동차인 T시리즈 실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야 사람들은 말과는 차원이 다른 교통수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Difference is Reference 

이종의 것들이 연결되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제3의 무엇을 만들어내는 일이야말로 창의성의 본질이야. 다름은 더 이상 배척의 근거가 아니라 새로운 충격을 주는 '모델'로서 가치가 클 뿐 아니라 '위협'이 아닌 '신선함'으로 읽혀야 마땅해  


다양성은 자연계에도 매우 중요한 이슈야. 종의 획일성은 멸종을 부를 만큼 치명적이거든.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우리가 즐겨 먹는 바나나야. 한때 바나나 대표 품종은 '그로미셀'이라는 품종이었는데 전염병(파나마병)에 취약해 순식간에 멸종했어. 지금 우리가 먹는 품종은 '캐번디시'라는 종으로 파나마병을 대비해 계량됐지만, 캐번디시 역시 단일품종인만큼 또 어떤 전염병이 돌아 멸종될지 알 수 없어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요즘 핫한 조나단의 '암살개그'는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이야. 흑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다른 인식', 즉, 편견이라면 편견일 수 있는 내적 인식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표면 위로 끌어올려 개그로 풀어가는 과정이 의외로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야


인간은 사회적 존재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환경과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또한 언제든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해. '그때 왜 그랬을까?' 이불킥 실수도 하고, 나도 모르는 편견과 편향이 작동해 어이없는 판단을 내릴 때도 많아 


다양성을 부르짖지만 좀처럼 현실화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한치의 오류도 없는 '완벽한 존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들이 중요한 위치에 올라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 상태라면 나 역시 언제 어떤 이유로 그들로부터 차별받는 피해자가 될지 알 수 없어


속으로는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가면을 쓴 위선자들도 위험해. 상대는 물론 자신조차 기만할 때, 편견과 차별 문제는 더 이상 공론화되지 못하고 음지로 스며들어 마치 곰팡이처럼 퍼져나가 관계 전체를 뒤덮을 테니 말이야


다양성을 인정하자. 말은 쉽지만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에 대한 본능적인 타자화, 무엇보다 은근한 우월감을 상쇄해 균형을 이루는 줄타기 곡예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야. 그다음 '다름'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는 인식의 전환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야. 최종적으로는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말과 생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실제 부닥쳐 보는 일이야 


처음엔 불편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다름'의 대상과 직접 접촉하고 말을 나누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듣고 하는 실질적인 교류가 일정기간 이어진 후에야 '다양성 포용'은 비로소 진척이 돼


다행인 건, 회사 내에서라면 '다름'의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야. 대략 비슷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같은 상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공통의 검증 절차를 거쳐 들어왔을 테니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 오히려 획일성의 문제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야


기껏해야 말투가 조금 다르고, I냐 E냐 T냐 F냐 성격이 정반대일 수 있겠지만 지구인과 외계인 정도의 다름이 아닌 바에야 조금만 마음을 열고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다양성'은 의외로 쉽게 정착될 수도 있어. 별 시답잖은 이유로 서로 편가르고 이전투구로 치고받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자기 자신이야. 궁극적으로 조직 전체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인간은 다양성이 디폴트 값이고, 

나를 포함한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보완하고 강화해 주는 관계 설정이야말로 개인과 조직 전체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세 가지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든 '극혐'이 나와 내 주변에 발붙일 이유는 없어


극혐이 만연한 곳에 천국이 있을 리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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