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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Sep 19. 2024

[신입의 직격] 장전된 권총을 상대손에 쥐어주지 말라

Ⅱ장. 織격 _ 관계관리 3_ 골디락스존

"언니~ 이것 좀 알려줘"

업무 중 들려온 소프라노톤 발성에 고개를 들어 그 진원지를 확인했어. 우리 팀 J를 찾아온 옆팀 S였어 


'언니?'

평소 친한 관계인 건 알았지만 한창 업무로 바쁜 사무실에서 들으니 왠지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 둘은 잠시 깔깔거리며 속닥거리더니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고 J가 돌아온 건 약 30분 후였어


S는 조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친화력을 타고난 대문자 E, 소위 '인싸'였어. 부서와 직급, 연차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친분을 만들었는데, 이들과는 술자리 등 사석에서 대체로 오빠, 언니, 동생으로 통했지 


여기까지만 보면 어디에나 있는 튀는 존재쯤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문제는 공사구분이었어. S는 사적, 공적 자리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만의 절친라인으로 끼리끼리 분위기를 만들어 회사의 온갖 가십과 뜬소문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빅마우스'로도 유명했어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민감한 이야기들이 조직 내에 떠돌고, 소문의 진원지를 찾겠다며 한 때 둘도 없이 가까웠던 절친들끼리 언성 높이는 등 볼썽사나운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지


회사는 친목 모임이 아니고 엄연히 이윤을 추구하는 공적인 집단이야. 물론 사람이 모여 만든 조직인만큼 사적 관계는 역시 얼마든지 생길 수밖에 없고, 적절한 인간적 교류는 권장할만한 일이지. 문제는 S의 경우처럼 사적 관계든, 공적 관계든 정도를 넘어서 극단으로 흐르는 경우야 


마치 감정이라곤 없는 로봇처럼 주어진 일만 처리하고 주변 동료들과의 사적 유대감 없이 칼같이 거리감을 지키는 '아싸' 역시 조직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해. 자기 자신에게도 좋을 건 없어. 협업이 반드시 필요한 조직 생활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얻는 건 '부적응자'라는 낙인뿐이야. 그 시간을 오롯이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쓴다고 쳐도 그 성장은 반쪽 짜리일 테니까 


인간관계, 특히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진다고들 하지. 전적으로 공감해. 초중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창 시절만 해도 이런저런 계산 없이 친구를 만들고 조건 없는 관계를 비교적 수월하게 이어갈 수 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해


본격적인 '생존경쟁'이 시작되기 때문이야. 선배, 동료, 후배 할 것 없이 결정적 순간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뺏고 뺏기는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할 경쟁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말과 행동에 의도가 실리고 그 진의가 뭔지 파악하려는 계산이 오가면서 관계는 조금씩 변질돼 


마치 죄수의 딜레마처럼 나 자신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마음을 열고 진정성 있게 대할 준비가 된 '선한 자'이지만 혹여 상대방이 그렇지 않다면? 의심이 생기는 순간, 불안해져. 별 것도 아닌 일을 확대해석해서 스스로 상처받고 그런 일이 잦아지면 역시 마음의 문을 닫몸을 사리게 돼


아무리 친해도 사회친구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 여기서 나와. 아무래도 학창 시절 까까머리 친구처럼 될 수는 없다고 여겨. 아무런 계산도 조건도 없이 그저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마냥 거리낌 없는 관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본심을 감추는 사회적 스킬은 세련되어지는데 적당히 가면을 쓰고 위선을 부리기도 하고 그럭저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익숙해져


좋게 보면 사회화가 진행되는 거고 나쁘게 보면 사회의 때가 묻게 되는 거지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로 채워져. 사고 수준도, 생활 방식도 그에 맞춰 표준화되다 보니, 어쩌다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면 이질감부터 먼저 생겨 


이즈음부터 어릴 적 친구들도 비슷한 수준끼리 어울리기 시작해. 전문직 친구, 대기업 친구, 중소기업 친구, 자영업 친구, 백수 친구가 한자리에 모이면 처음엔 반가워도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고 뭔가 불편해. 과거 추억만으로도 몇 시간씩 떠들 순 있지만 뭔가 생산적이진 않아. 결국 이야기가 통하는 부류끼리, 비슷한 레벨끼리 따로 모이면서 전체 모임은 사라지기 일쑤야


하물며 머리가 굳은 이후 만들어진 직장 내 관계는 오죽할까? S의 경우처럼 겉으로 보기에 끈끈하게 엮인 것 같은 관계도 아무것도 아닌 이유 하나로 산산이 부서지기도 하고. 어제까지 절친이 오늘은 원수처럼 틀어지기도 하고. 회사의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더라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변질되기 쉬운 상온에 방치된 우유 같더라고  




'골디락스 Goldilocks'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상태를 뜻하는 용어로 경제, 마케팅, 의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지.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 에서 유래했어. 숲 속 어느 집에 큰 곰, 중간 곰, 작은 곰 세 마리가 살고 있었어. 각자 냄비에 죽을 끓인 곰들은 죽이 식을 동안 산책을 나가는 데 그 사이 골디락스라는 이름의 금발머리 소녀가 이 집을 찾아와. 배가 고팠던 소녀는 냄비에 들어 있는 죽을 맛보는데 첫 번째 죽은 너무 뜨거웠고, 두 번째 죽은 너무 차가웠어. 마지막 세 번째 죽만 먹기 좋게 식어 있었지. 골디락스는 결국 세 번째 죽그릇을 싹 비워 버렸다는 이야기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 '골디락스존'에 위치한 행성이야. 항성인 태양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수성처럼 불지옥이 되고, 너무 멀면 해왕성처럼 얼음지옥이 되는데, 암석 행성으로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기온을 가진 지구는 생명체의 탄생과 생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오늘날 인류를 포함한 수많은 종들이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로 진화했지


관계에도 이렇듯 '골디락스존'이 존재해. 가족 간에도 지나치게 가까우면 밀착된 나머지 주체적인 삶이 어렵고, 또 지나치게 멀면 무관심해지다 못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하물며 직장에서 만난 사람 간의 관계란 어때야 할까? 


S처럼 공사 구분 못하고 조금만 친해지면 언니, 오빠, 동생으로 관계를 만들고 내편 네 편으로 나누어 은밀한 비밀을 나누는 행위가 위태해 보이는 이유야




관계의 골디락스존 만들기

살면서 관계를 맺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지. 나만의 공간을 상대에게 일정 부분 내주는 일이니까. 얼마만큼 내줘야 하나? 에 대한 기준은 당연히 스스로 정하는 거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선을 그을 것인가? 말하자면 나만의 골디락스존을 만드는 일이야


그런 게 없다면 어떤 관계든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어. 친절과 관심을 가장한 상대에게 심각하게 내영역을 침범당하고도 '베프니까' 따위 사회적 가스라이팅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지. '착한 사람 콤플렉스'까지 겹쳤다면 치명적이야 


온갖 관계에서 한 번쯤은 뚝 떨어져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대체 왜 힘든지, 무엇이 불편한지도 모른 채 모든 관계의 을이 되어 질질 끌려가는 나를 발견한 순간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이미 때는 늦었을지도 몰라 


자신만의 골디락스존을 설정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능동적이고 유연한 관계를 직접 만들고 컨트롤할 수 있게 돼.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의지로 끊어낼 수도 있겠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꽁꽁 싸맬 필요도 없고 또 모든 걸 다 내보이며 제발 이 관계를 이어가달라고 애걸할 필요도 없어 


관계는 두 당사자간의 상호작용이야. 어느 한쪽이든 일방적 관계가 되면 오래가지 못해. 서로가 용인할 있는 수준에서 관계의 거리를 설정할 수 있을 때, 마치 골디락스존에 위치한 지구에 생명이 태동하고 다양한 종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생명력 넘치는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어


장전된 권총을 상대의 손에 쥐어주지 마

'약점을 보이면 평생 책잡힌다'라는 말이 있어. 공적관계에서라면 어느 정도 타당해. 무슨 일을 맡겼을 때 무책임하다거나 꼼꼼하지 못하다거나 하는 결정적 약점을 노출하면 커리어에 치명적일 테니 말이야 


그런데 사적 관계에서라면 좀 달라. 타인과 유대감을 맺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 취약점을 적절히 드러내고 그로부터 공감대를 얻을 때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외모든, 스펙이든, 재력이든 실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놓고 과시하고 잰 체하는 사람이라면 비호감 사기 십상이야. 잘난 사람이 제 입으로 '잘남'을 말하는 순간 깨게 되어 있어. 하물며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 완벽한 척하는 사람만큼 꼴불견도 없어


술 한잔 하며 이런저런 실수담, 약점 등을 솔직히 털어놓고 '아 이런 사람도 이런 면이 있구나'라는 공감대를 얻을 때 능력, 역량과는 별개로 인간적 매력이 생겨. 한점 약점도 없는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는 소설은 재미도 감동도 없는 법이야


단, 치명적일 수 있는 단점, 취약점은 죽을 때까지 혼자만 갖고 가는 게 좋아. 


"1막에 권총이 등장하면 3막에는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

안톤 체호프라는 유명 극작가가 이야기한 시나리오 작법 원칙 중 하나야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손에 쥐면 쏴보고 싶어지는 게 인간 본성이야. 지금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사회생활이란 게 언제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섭리야. '너는 믿으니까' 라며 치명적일 수 있는 내 약점을 상대의 손에 쥐어주는 순간, 언제 그 총구가 내게로 돌려질지 알 수 없게 돼 


인간관계, 특히 직장에서의 관계는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아야 해

솔직해지되, TMI가 되지는 말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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