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베를린에 오지 마세요

겨울이 더 서글퍼지는 시기에 대해

by 허일리

가끔 한국에 있는 친구이 "베를린은 언제 가는 게 좋아?"라고 물을 때가 종종 있다. 베를린은 (혹은 유럽은 대체적으로) 여름이 한국처럼 습하지 않아서 여행하기에 딱 좋은 시기이다. 그 시기는 대략 6, 7, 8월 정도로 짧은 편이다.


봄은 어떻냐고? 여기는 봄이 정말 짧다. 한국처럼 3월부터는 슬슬 꽃이 피고, 5월쯤 되면 준여름에 달할 정도로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모습은 여기에서는 찾기 어렵다. 비록 내가 5월을 베를린에서 보내본 적이 세 차례밖에 없긴 하지만, 관광으로 왔던 2019년에도, 2023년에도, 2024년에도 5월 마지막 주 직전까지 패딩에 부츠까지 신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관광으로 왔던 2019년에는 심지어 그때까지 관측된 것 중에서 역사상 가장 추운 5월이라고 뉴스에서 보도했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지구온난화가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에 따라서 5월이 베를린을 방문하기에 좋은시기일지는, To be updated 일거라고 생각한다.


9월은 해마다 온도가 들쭉날쭉해서 추울 때도 있고 더울 때도 있다. 11월부터는 겨울에 진입하며 해가 급격히 짧아지기 시작한다. 5시 경에는 어둑어둑해지며 해가 진다. 그럼 낮에는 해가 있냐고? 그것도 복불복이다. 따라서 베를린을 기준으로 하면 11월에서부터 4월까지 약 5개월 정도는 너끈히 겨울이라고 볼 수 있다. 5월은 깍두기라서 한국으로 치면 꽃샘추위가 있는 3월 초순의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겨울이 지겹도록 긴 와중에서도 내가 강력히 방문을 비추하는 시즌은 연말연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유럽에 방문할 사람이 없다면) 할 게 없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대개 24일 오전까지 영업을 하고 오후부터는 철수를 한다. 물론 대도시의 일부 마켓들은 25일을 포함하여 그 이후 며칠 정도 연장영업을 하는 곳도 있지만, 극소수다. 너무 올드한 예시일 수는 있지만 한국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24일-25일에 명동 시가지를 걸으며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유럽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행사이고, 다들 집에서 각자의 가족들과 보내기 바쁘다. 소도시일수록 밤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기 힘들다.


2. 12월 31일은 위험하다: New Year's Eve를 독일에서는 Silvester라고 부르는데, 이 날은 독일 사람들이 그간 억눌려왔던 광기를 불꽃놀이로 승화시키는 날이다 (농담이다). 마치 시가지 총격전처럼 꽝!꽝! 하는 소리가 빠르면 29일/30일 밤부터 시작된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는 31일만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소리가 31일 저녁시간 이후부터 증폭이 되면서 31일에서 1일로 넘어가는 앞뒤 30분간 절정에 달한다. 오거나이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시민 개인들이 수퍼마켓에서 폭죽을 사서 직접 길에 나가서 폭죽을 터뜨리는데 말도 못하는 카오스다. 한국에서 본 제야의 종소리 세레모니 등을 생각하고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열리는 카운트다운에 가면 굉장히 당황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폭죽에 진심인(이걸 진심이라고 해야할까) 사람들이 많아서 인명사고도 많이 일어난다는 것. 올해도 전국적으로 5명이 사망했다고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다. 작년에는 우리 집 대각선 맞은편 집의 창문이 깨졌는데 이래서 독일 사람들이 창문 수리에 대한 보험을 가입하는구나 싶었다.


3. 공휴일이 많아서 여행을 계획하기가 어렵다: 독일은 지역별로 공휴일이 다른데, 베를린의 경우 공식적인 휴일은 12월 25일, 12월 26일, 1월 1일이다. 안그래도 일요일에 수퍼가 다 닫는 독일이다보니 공휴일이 이렇게 연속적으로 끼게 되면 여행을 계획하고 생필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과, 실베스터인 12월 31일은 단축 영업을 하는 곳이 많으니 (수퍼 포함) 이 역시 염두에 둬야 한다. 한달살기나 장기 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미리 사두면 되는거니 큰 문제는 아닌데, 하루 하루 일정이 아쉬운 여행자라면 꽤나 크리티컬할 수 있다.


평소같으면 여는 관광지, 갤러리, 박물관, 쇼핑몰, 상점, 식당, 카페 등등도 이 때는 다 자기네들 마음대로 (저희는 24일에 닫아요/저희는 24일에 오전 영업만 해요/저희는 26일에 열어요 등등) 열고 닫으니 이걸 하나 하나 확인하는 것도 일이다. 참고로 구글 지도에 나와있는 정보를 맹신하지 말라. 손으로 써서 가게 앞에 붙여놓고 구글 지도 정보는 업데이트 하지 않는 곳도 많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베를린 방문 시기는 다음과 같다

티어1. 6-8월 사이: 정말 추천하는 시기이다. 이 중에서도 더 좁혀보자면 7, 8월이 가장 좋다.

티어2. 9월>5월,10월

티어3. 12월 초-중순 (23일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 -> 크리스마스 마켓이 주 목적이라면 추천한다


비추하는 시기

티어4. 1월, 2월, 3월, 4월 -> 독일 밖에 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티어5. 12월 25일부터 1월 초순까지 -> 베를린은 아니지만, 뮌헨이 있는 바바리아 지역 등의 경우 1월 6일도 공휴일이기 때문에 연말연시가 조금 더 긴 느낌이 있다.

(다만, 독일로 이민을 오고 싶은데 아직 독일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기간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왕이면 90일 꽉 채워서. 최악을 경험해봐야 더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


이런데도 겨울에 베를린에 오고싶다고? 그렇다면 아래의 조건들을 꼭 유념하기 바란다.

1. 공휴일/세미 공휴일이라 가고 싶은 곳이 문을 닫아도 짜증내지 않기

2. 해가 4시에 져도 짜증내지 않기

3. 아침에 일어났는데 해가 없어도 짜증내지 않기

4. 구글지도에서 열려있다고 해서 갔는데 닫혀있다고 짜증내지 않기


당신의 이상적인 베를린 여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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