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비극은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며, 보통 태생이 고귀한 주인공, 즉 왕이나 유명한 전사가 성공을 거두며 찬사를 받다가 자신이 저지를 잘못 때문에 파멸이나 수치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해준 :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해준 : 나도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
서래 : 기쁜가요?
해준 :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 : 이럴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서래 :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김승옥, <무진기행>
서래 :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서래 : 해준 씨.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 : 나는 해준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예술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실패자가 우리에게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자질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의 창조자나 기록자가 그렇게 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특히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 알랭 드 보통,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