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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을 낳아주는 오리

by 마머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혹은 공산주의는) 인간의 욕심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외면하기 때문에 망한다고요. 그래서 자본주의가 정답이라고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듯이 뿌듯해하거나 심지어 으스대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 만한가요? 아닙니다.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욕심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상가 주인, 회사 주인, 주주, 집주인은 모두 긁어먹을 수 있는 최대한도로 식당 요리사나 말단 일꾼을 착취하려고 합니다. 식당 상가 건물주는 황금알을 낳아주는 오리인 식당 주인들의 뱃속에서 한계치까지 황금알을 뽑아먹기 위해 극한까지 월세를 올립니다. 그러다 지나쳐서 결국 오리 배를 째버리곤 합니다. 빚까지 내며 버티던 식당이 망해 나자빠집니다. 그래도 당장 피를 흘리며 죽는 건 오리이고, 오리 주인은 황금알을 팔아 한동안 살 수 있습니다. 상가 주인은 전체 경제 상황이 극히 나빠져 더 이상 식당을 경영하고 임대료를 바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가서야 쓰러집니다.


기업 사장들은 정부가 개입해서 강제로 통제하지 않으면 낮출 수 있는 한계까지 급여를 낮추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낮추면 그 돈 받고는 일 못하겠다고 나가는 사람의 뒤를 이어 그 돈 받고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해서 내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내리려고 합니다. 어디가 한계인지 분명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통 사람들의 삶이 엄청나게 피폐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중세에도 농민을 너무 뜯어먹으면 농민들이 야반도주해 도적떼가 되고, 아직 남은 양민들은 그 도적떼에게 털리게 되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때 선량한 소작농과 악랄한 지주, 선량한 농민과 잔혹한 강도가 원래부터 딱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월급쟁이인 사람, 뜯어 먹히는 입장인 사람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상가 하나 또는 집 하나 마련하고 세를 주면, 세 들어온 사람에게서 최대한 뜯어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시스템인 겁니다. 적절한 통제가 없으면 파멸합니다. 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스로는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생산물을 뜯어먹는 세력, 귀족들, 지주들 등의 욕심을 제때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면 결국 체제가 허물어지게 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백성들을 과도하게 수탈하는 귀족들, 이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는 나라 전체의 경제 상황, 결과적으로 나라 전체의 힘이 약해지는 흐름을 뻔히 보고 바보 같다고 비웃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짐짓 잘난 체하며 지금의 체제가 옳고 잘 돌아가고 있다고 웅변하기 바쁜가요?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세를 볼 때는 왜 자기가 비웃던 그 바보가 되고 마는 걸까요?


지난 수십 년간 유난히 부유한 극소수의 부는 더더욱 증가했고, 평범하게 가난한 대다수 인간이 가진 몫은 더더욱 줄어들었습니다. 식당 주인은 뼈 빠지게 장사해서 상가 건물주 배만 불려줍니다. 고용된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수익은 사장과 주주들이 대부분 가집니다. 내 작은 월급의 삼 할은 또 집 월세로 빠집니다. 물론 상가 건물주도, 내 집주인도, 회사 주인도, 주주들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져간 몫에서도 먹고사느라 빠지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걸 빼고 남겨지는 양이 있고, 이것이 기존에 가진 자본에 붙어 자본이 증식되는 그 사태에 주목해야 합니다. 큰 자본일수록 더 쉽게 몸집을 불립니다. 체제 전체로 보면, 사람이 만들어낸 가치가 사람에게 온전히 돌아가지 않고, 자본에 가서 붙는 상황입니다.


사람이 생산하고, 사람이 소비하는 가운데, 자본이라는 것이 생산된 가치의 큰 부분을 가져갑니다. 자본은 그 자체로는 사물일 뿐이고, 사람에게 귀속됨으로써 그 좌표가 잠시 고정될 뿐입니다.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이유는, 크게 보면 자본이 점점 몸을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이 귀속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생산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자본이 붙여지지 않는 사람들은 빈자로 남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괜찮은가요? 사람은 무엇을 위해 생산하나요? 자본을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사람 스스로를 위해서인가요? 세상에 단 한 명의 사람만 사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이 쌀을 생산해서 자기가 먹는 대신, 배를 곯아가며 상당량을 동굴에 쌓아만 둔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왜 동굴을 위해 힘들게 생산하나요? 당연히 실제 현실에서 각각의 사람들, 우리들은 저마다 사람-자기자신을 위해 생산활동에 임합니다. 농부로, 미용사로, 사무직원으로, 배달부로, 기타등등, 모두 저마다 자기가 먹고살려고 일합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를 보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치들 중 상당량을 떼어놓고 있단 말입니다. 그 떼어놓아진 가치는 극소수의 일부 인간들 및 법인의 명의로 놓여 있고요. 체제 전체를 보면 주린 배를 싸쥐고 고통스러워하며 애써 생산한 식량을 동굴에 쌓아놓기만 하는 우주 유일의 인간과 같은 꼴이란 말입니다. 우리 개별 인간이 잘못된 게 아니고, 체제가 잘못된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의 황금알을 낳는 오리들은 스스로를 탓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저마다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내 몫이 적은 것은 내가 더욱 애쓰지 않은 탓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황금알을 날름날름 집어가는 쪽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든 오리들은 자살합니다. 그 빈도가 다른 나라의 오리들에 비해 매우 높습니다. 새끼도 잘 낳지 않습니다. 알을 줍는 입장에서도 슬슬 걱정될 법도 한데, ‘내가 죽을 때까진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있는 것 같습니다.


황금알을 줍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누구든 노력하면 알 줍는 입장이 될 수 있으며, 알 낳아주고 사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너도 알을 주우라는 소리가 항상 들립니다. 하지만 알 낳는 오리가 있어야 알 줍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은, 사람이 주워가는 황금알은 오리가 힘들게 낳아준 거라는 사실은 숨겨집니다. 많은 오리들은 알 줍는 이들을 마냥 부러워하며 노력에 박차를 가합니다. 오리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고, 오리들은 저마다 상위 5%쯤을 쳐다보며 그만큼 올라가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95%가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요.


우리는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도 아니고, 오리입니다. 거위는 수틀리면 사납게 달려들기라도 하지, 오리는 저희들끼리만 싸우고 알 줍는 사람한테는 반항도 안 하니까요.


Dall-E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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