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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대통령

가상의 대선 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글

by 마머

1. 서문


현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은 아마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닌 분들도 있지만, 저는 대통령의 탄핵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윤석열은 비선 인물에게 의지했습니다. 박근혜 때도 무자격의 아주머니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국민적 공분을 샀고, 금번에 무자격의 아저씨들, 도사 내지는 점쟁이가 대통령을 휘두른 것도 공분을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 대신 점쟁이들에게 의존한 대통령도 자격을 박탈당해 마땅합니다. 더군다나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하려 했던 시도는 용서될 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그냥 보여주기식 계엄이었다, 원래 실패를 목표로 추진된 일이었다,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무수한 진술과 정황이 그것이 거짓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설령 거짓말이 아니라 해도 황당무계할 따름입니다.) 현 대통령이 탄핵당하면 대통령이 새로 뽑혀야 합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요즘 내가 바라는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인가, 사람들은 어떤 대통령을 원할까,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오늘날 우리나라에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대통령의 요건을 갖춘 사람이 대선에 출마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그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글을 한번 써 보기로 했습니다.


목차

2. 누가 “우리”인가? 우리에겐 정치적 공통분모가 필요합니다.

3.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섭시다.

4. 우리는 우리의 불행을 직시하고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5. 저출산과 지방 소멸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응이 필요합니다.

6. 노동자 존중이, 그리고 일자리를 사회적 보금자리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7. 경제력은 곧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갖는 힘입니다.

8. 실리적 균형 외교와 방어적 가치 외교를 추구해야 합니다.

9. 강한 국방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10. 내부 경쟁에 청소년과 청년의 생기를 다 써버리는 교육 시스템을 개혁해야 합니다.

11. 모든 주제의 유기적 연결



2. 누가 “우리”인가? 우리에겐 정치적 공통분모가 필요합니다.


존경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친애하는 나의 동료 시민 여러분, 현 시국으로 인해 더욱 선명해지고 있습니다만, 점점 심해져 가는 정치관의 분열과 진영에 따라 과도하게 다른 세계 인식, 그에 따른 소통의 불가능성은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서서히 심각해지고 있던 문제입니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은 개인들을, 또는 작은 규모의 그룹들을 점점 자기만의 작은 세계 안에 가두는 효과를 낳았고, 이는 공유된 공통 세계의 축소를 동반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다 같이 천하장사 강호동을 알았고, 만화영화 꾸러기 수비대를, 포켓몬스터를 알았고, 9시 뉴스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개그콘서트와 무한도전을 같이 봤지만, 이제는 각자 다르게 형성한 유튜브 피드에서 각자의 선호 채널을 봅니다.


서양이 주도한 지난 세기의 사상들은 대체로 전체주의와 그것의 폭력성에 대한 예민한 경계에서 출발하여 다양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왔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지성계의 주류, 그리고 여기에 접점을 가지는 중간계층 시민사회의 의식은 이런 흐름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양성, 차이, 다채로움 등이 그 자체로 어떤 안정적인 정치적 공동 기반 같은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이미 안정된 정치 사회적 기반이 다져진 연후에 그 위에서 펼쳐질 수 있지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소위 제 1세계라는 공간은 그런 특권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그 기반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과 도둑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살긴 어려움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인정할 수 있는 다름이 있고 없는 다름이 있는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려면 그 다름보다 더 낮은 차원에 공통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근본적인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윤곽을 뚜렷이 하려면 먼저 “우리”가 공유하는 최소한의 공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해야 하고, 이를 통해 저절로 누가 “우리”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근본적인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제대로 대화조차 하기 힘들어 보이는 지금, 이런 최소한의 공통 기반에 대한 합의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합의는 한 번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며, 늘 조금씩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주 이것에 관해 소통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지금은 무엇이 그런 기반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의식이 그 기반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이 생각에 기반해 존립하는 나라를 공화국이라 부르는 거겠지요. 이 생각이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이 내용이 우리 헌법의 제1조로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공화국인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가족구조의 확장판이 아닙니다. 즉, 대통령은 국부가 아니고 영부인은 국모가 아니며, 일반 국민은 그들의 자식 혹은 가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직무를 맡은 동료 시민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대부분의 문명권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 비슷했듯 왕을 정점으로 하여 철저히 가부장적으로 (“군사부일체”) 위계화된 정치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탓에 여전히 구시대의 정치적 세계관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대통령을 왕으로, 자신과 정치인들을 그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쳐야 하는 중세적 신하로, 혹은 대통령을 아버지로, 자신을 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억압적 가부장 체제하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어서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최소한의 공통 가치에 위배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습에 젖은 사람들을 국외추방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합의된 공통 가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사람”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사고방식 또한 공동 가치의 일부를 이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권이라는 개념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설령 “우리”가 아닐지라도, 그가 중요한 규칙을 어겨서 “우리”가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둘지라도 그는 여전히 사람이기 때문에 고문당하지 않고,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의식주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 이것도 “우리”가 갖춰야 할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기본적 의식주 수준이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준에 따라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끼니도 다 못 챙기는 형편이라면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삼시세끼를 다 챙겨줄 여유는 당연히 없겠지요. 우리나라가 풍요로워질수록 우리가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보장하는 수준도 같이 올라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공동의 기반 이외로도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공동의 가치와 규칙들, 그것을 지켜야만 “우리 동료 시민” 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항들이 있을 텐데, 헌법 제1조 이하의 내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3.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섭시다.


"우리"로 인정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을 충족시켰다면, 그 기반 위에서는 이제 온갖 다양성과 창의성이 펼쳐져도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치의 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관은 대체로 진보라 부르는 계열, 대체로 보수라 부르는 계열,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느 쪽에도 고정적으로 속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고요. 어느 한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그쪽 "진영"에 소속되어버려 다른 쪽 사람들과는 아예 척진다고 할 정도로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미디어 환경의 영향에 힘입어, 이제는 서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거의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지경에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은 한쪽 진영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점점 극단화되는 경향을 띱니다. 청문회 등에서 상대 진영 사람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면 같은 진영에 소속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진영 정체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점점 더 정치인들이 자신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청문회를 보면서 소리 좀 그만 지르고 질문했으면 답변 끊지 말고 좀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진영 정체성에 빠진 사람들은 비판받으면 "너는 안 그랬냐?", "너도 그랬잖아!" 같은 식의 반응을 보이게 되기 쉽습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구체적 사안에 대한 건설적 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내가 공격받았다는 느낌과 그에 따른 방어-공격적 정서 반응이 채우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좌우, 보수·진보의 구분은 점점 실효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좌파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저 나쁜 놈, 틀린 생각, 이런 말의 동의어에 불과했습니다. 저놈 좌파다! 이런 말은 상대의 정견에 대한 건조한 서술이나 분류가 아니라, 좌파 = 나쁜 놈, 이므로 저놈을 척결해야 한다는 뜻에 불과하였습니다. 진보라는 개념은 이런 공격에 맞서 자신의 정견에 다른 이름을 붙임으로써 설 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시도로부터 비롯된 경향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좌파, 우파 명명의 유래를 따지면 으레 유럽에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의 실제 정치 상황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결국 좌우, 보수·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정치적 아이디어나 입장과 무관하진 않지만, 거기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진영 다툼이라는 조건에서 정략적 이유로 자리 잡은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런 분류에서 벗어나 국정 운영의 구체적 목표들을 위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들과 어떤 아이디어를 지지하느냐에 따른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차원에서 정치적 입장차이가 발생하고, 그 차이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건설적인 정치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국정 운영의 목표들이 세워져야 하는 걸까요? 이 문제에 답을 내놓는 일부터 단순한 일이 아니며, 다양한 의견들과 그 차이 속에서 많은 논의들이 오가야 할 사안일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 후보로서 이 주제에 대한 제 생각들을 제시할 책무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나씩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4. 우리는 우리의 불행을 직시하고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생활 수준을 가진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대단히 불행한 편입니다. 우울증 유병률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출산율은 압도적인 세계 최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불행을 담아내는 담론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불행을 심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자살률과 출산율이 언급될 때, 사람들은 물론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태도도 보이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제 감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저는 우리나라에 사람들이 직접 느끼고 겪고 있는 불행을 담아내 주는 담론이, 언어가 너무나 심하게 결핍되어 있다 보니,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언급 자체가 그나마 자신의 불행을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세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힘든 마음에 대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다, 그러게 학창 시절에 노오력하지 그랬냐, 누가 뭐 뭐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이렇게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날 선 이야기들이 넘실거립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그저 참아야 합니다. 참고 참은 마음을 드디어 담아내 주는 빈약한 말이 그나마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당성을 가지고 "거봐, 불행이 넘쳐나는 거 맞잖아" 라고, 힘든 마음을 대변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 줄 아느냐'는 핀잔이 날아들곤 하지만요.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더 많은 불행을 가리키며 불행을 호소하는 동료 시민의 입을 틀어막는 대신 우리의 불행을 설명할 적절한 말들을 함께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로소 우울증 유병률과 자살률을 낮추고, 나아가 출산율을 개선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심리치료사의 자격을 관리하는 법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서 온갖 잡다한 자격증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자격 없는 사람들이 심리치료사나 상담사를 자칭하게 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상담사나 치료사를 고르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합리적인 자격 관리 제도를 만들어 상황을 개선하고자 합니다. 이미 상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불행을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의 개선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5. 저출산과 지방 소멸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응이 필요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아서 기왕이면 서울대, 안 되면 적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지방 국립대에 진학해야 한다는 기조로 양육되고 교육되어 왔습니다. 대학 미만의 학력은 실패로 취급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인간으로서 질이 나쁜 사람들에게 붙는 딱지 같은 것으로까지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인서울"이 전국 모든 청소년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된 인생 목표였습니다. 시골 동네에서는 마을 아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 그게 곧 자랑거리였습니다. 서울행은 인생의 성공으로, 지방행은 인생의 실패로 간주해 온 지난 수십 년의 역사가 오늘날 노골화된 지방 소멸로 향하는 고속철도였습니다. 지방 소멸은 결코 뜬금없이 나타난 재난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해졌던 미래였습니다.


모두가 서울로 향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욕망의 종류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같은 것을 추구했습니다. 명문대 졸업장, '사' 자 달린 직업, 고급 승용차, 서울에 있는 아파트 등등 상당수는 결국 돈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들이요. 서울 타령이 서울로의 인구집중과 서울 과밀화를 낳은 것처럼, 욕망의 일원화도 그 욕망으로 쏠림과 경쟁의 과열을 낳았습니다. 수능 때만 되면 "여러분 모두 수능 대박 나세요" 같은 표면적으로는 좋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상대평가의 체제에서 다수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함은 자명합니다. 이런 체제 속에서 열심히 하면 누구나 원하는 걸 얻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며, 이 기만은 불행을 증폭합니다. 노력만 하면 모두가 욕망하는 것을 누구든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나는 나름 열심히 했는데 잘 안됐어' 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열심히 하면 다 되는걸? 네 실패는 네가 열심히 안 했다는 증거야!' 이렇게 입을 막아버립니다.


노력 이데올로기에 입이 틀어막힌 사람들은 패배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됩니다. 우울증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뻥 뚫립니다. 낮은 자존감, 자기 책망, 실패감이나 좌절감 같은 안 좋은 기분 상태는 우울증의 핵심 지표들입니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장소를, 그리고 그 장소에서 즐겁게 뛰노는 것처럼 보이는 타인들을 SNS-미디어-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박탈감을 느낍니다. 이런 박탈감은 잘 의식되지 않는 분노로 전환되어 쌓이기도 하며, 이렇게 뚜렷한 표적 없이 누적된 분노는 뒤틀린 방식으로 인식된 다른 표적을 향해 뿜어져 나오곤 합니다. 저는 지난 십여 년간 우리 사회의 상당히 중요한 화제였던 젊은 남녀 간의 상호 혐오도 일정 부분은 이런 흐름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저출산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으며, 가벼이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조사와 분석 결과들이 보여주듯 출산율은 소득수준과 양의 상관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는 아이를 낳고자 하는 이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충분한 정책 개발 없이 대강 각 부처와 지방정부에 예산을 배정해 주고 저출산 대책에 사용하라고 내맡기는 식의 대응으로는 예산만 무의미하게 줄줄 샐 뿐 실효를 얻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약한 경제력이 저출산을 심화시킴은 분명하므로, 각계 전문가들을 모아 치밀한 정책 전략을 세워 예산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며, 저는 앞서 언급한 패배감, 박탈감, 자존감 하락을 초래하는 요소들이 갖는 영향력도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지 않은 어른이라야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출산율 제고 자체만을 맹목적으로 좇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째서 출산율을 올리려 하는지부터 묻고 출발해야 합니다. 연금 때문에, 경제 성장률 때문에, 저는 이런 것은 틀린 대답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도구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글러 먹었습니다. 요점은 삶, 되도록 덜 불행하고 되도록 더 행복한 삶입니다. 극단적으로 낮은 출산율은 이게 망가져 있음을 드러내는 증상이고 지표입니다. 삶을 개선하여 사람들이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출산율 상승은 이 작업의 성과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범국가적인 캠페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변화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 국민의 욕망이 하나의 작은 점으로 집중되어 모두가 그 점을 향해 돌진하며 서로를 밀치고 짓밟는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두 번의 대통령 임기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파적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기구를 설치하고 전문 역량을 끌어모아 장기적 계획을 짜고 정권이 바뀌어도 프로젝트가 수행될 수 있게끔 하는 데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략적 방향성은 우리가 다양한 꿈과 욕망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의식 개선 캠페인과 교육 내용의 개선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제 다음 단원에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6. 노동자 존중이, 그리고 일자리를 사회적 보금자리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만연해서 이에 대한 비판적 의식마저도 가지기 힘든, 노동의 종류에 따른 차별의식이 존재합니다. 한 편에는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면 가지는 훌륭한 직업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어른들 말씀 안 듣고 공부를 등한히 한 죄에 대한 처벌로 받아들여야 하는 형벌로서의 직업이 있습니다. 다들 전자에 속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전자의 자리는 제한돼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설령 청소년의 80%가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마련된 자리는 청소년 30% 에밖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남은 50%는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살았는데도 자기 삶이 실패했다는 느낌을, 또는 어른들 말씀을 충분히 열심히 따르지 않은 죄로 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 아니면 도만 있는 건 아니고, 많은 중간단계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겠지만, 단순화하자면 말입니다. 이런 구조는 상대평가의 제도를 통해 공고화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의 경쟁 풀에 뛰어들어 거기에 목을 매고 삽니다. 절대다수는 낙오할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의 불행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절망적인 구조에 다들 뛰어들고 있습니다. 모든 일들은 우리 사회,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며, 따라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저 희미한 이상론으로 잘 안 보이는 유령처럼 떠돌 뿐입니다. 태산 같은 존재감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꽉 잡고 있는 특정 직업들에 대한 차별적 우대,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그 직업들을 향한 경쟁, 다른 직업들을 깔보는 시선, 직종 내에도 존재하며 업무상 필요를 넘어서 인간 자체에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위계 서열 의식, 이런 것들은 조선시대의 신분과 사농공상 관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에도 의사나 변호사를 성공으로, 청소부나 슈퍼마켓 계산원을 성공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그런 시각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우리나라에선 더 세고, 그 존재가 더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맡아 협력하여 공동의 사회를 꾸려나가며, 저마다의 맡은 일들은 모두 가치 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관념은 힘이 없습니다. 이런 시각을 강화해야 합니다. 직업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아주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직업이야말로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도 더 큰 정도로 한 사람에게 사회 속에서 존재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직업이 많은 세태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이 존중받는 기분을 얻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이런 환경은 정신건강의 필수 요소인 자존감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철저한 자본주의 질서로 밀어 넣어지면서 사람들이 경제적 개인으로 지나치게 원자화되고 강력한 경쟁 압력에 노출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부작용에 심하게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극소수의 기득권 세력은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시절엔 우리나라 발전의 엔진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제는 차가운 자본주의 논리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제외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주식회사 시스템을 통해 보통 사람들로부터, 일명 “개미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지만, 이를 충분한 배당으로 돌려주지 않고, 툭하면 기업 분할 등의 꼼수로 책임을 회피하고, 주주의 경영 개입을 수용하지 않고 개발독재 시절의 혈연 및 족벌 경영체제를 고수하곤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산업 수준을 유지하려면 아래로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사회주의적 보조 장치를 통해 보호하여 근본적인 사회의 동력과 생명력을 유지하고, 위로는 기업을 자본주의적 질서에 제대로 편입해 발전을 위한 압력에 노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차가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적 유대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후세대를 육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득권 세력은 체제의 보호를 받으며 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희미한 에너지를 빨아 지탱되고 있습니다. 국가의 기반인 보통 사람들이 더 쇠약해지고 무너진다면, 그 위에서만 성립하는 사회의 상층부 또한 머잖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대응 방향성으로, 첫째, 저는 노동 소득의 적극적인 보호가 필요하며, 자본소득의 보호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판데미 이후 한동안 전반적으로 들떴던 주식시장과 가상화폐 투기 시장, 그리고 지난 몇 년간 계속 올랐던 집값 및 임대료는 노동소득 위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이, 자신의 직업이, 나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사람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주었습니다. 이는 제가 보기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들, 먹는 것들, 받는 서비스들은 전부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지폐나 전산화된 은행 계좌에 기재된 디지털 숫자로부터 마법처럼 저절로 솟아나는 게 아닙니다. 김치 공장에서 열심히 김치를 만들어야 슈퍼마켓에 김치가 나오는 것이고, 주방에서 누가 치킨을 튀기고 도로에서 누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야 우리 집에 치킨이 오는 것이지, 돈 자체가 그것들을 뿅뿅 솟아나게 하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당연한 근본을 잊게 만드는 풍조가 만연한 것 같습니다. 건물주가 받는 임대료는 그 공간을 빌려서 치킨을 튀기거나 국수를 말아서 파는 사람이 땀 흘려 번 돈입니다. 물론 건물도 저절로 뿅 하고 솟아난 게 아니고 많은 자원과 노동을 투입해 힘들게 만들어낸 것이니, 건물을 빌려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도 틀린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건물 만드느라고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받아 가는 몫과 건물 소유주가 가져가는 몫 중 어느 쪽이 더 클까요? 최근 서울 강남 상가의 공실률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다들 지난 수년간 임대료가 몇 배나 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공실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요. 하지만 아직 채워져 있는 80% 이상의 장소들에선 여전히 사람들이 그 증가한 임대료를 감당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럼 임대해서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이 고용한 사람들, 건물 짓는 사람들의 소득도 세 배 늘었습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정합니까? 자본소득자들의 소득을 만들어주는 노동자들의 수입은 답보하는데 자본소득자들의 소득은 늘어난다면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원활하고 속도 높은 경제 순환을 위해 자본 융통, 즉 금융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금융은 어디까지나 원활한 경제순환을 위한 수단입니다. 이 원활한 경제순환이란 게 뭘까요? 경제란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들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이 전체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다종다양한 자본 융통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단순히 자본만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경제에의 기여는 바로 이 과정에 있습니다. 호스텔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당장 건물 살 돈이 없으면 빌려서 임대료를 내거나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사고 은행에 이자를 쳐서 천천히 갚을 수 있겠지요. 건물 살 돈을 모아서 운영을 시작하려면 긴 세월이 걸렸을 텐데, 금융 덕에 빨리 이뤄질 수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이 공로로 받아 가는 몫이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갖는 몫보다 까마득하게 더 많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익힌 기술로 우리중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보통 일단 돈으로) 받습니다. 의사는 의료서비스를 생산해 제공하고 돈을 받고, 귤 농부는 귤을 생산해 제공하고 돈을 받습니다. 땅을 소유해서 그 땅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사람은 무엇을 생산했습니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경우에 가져갈 수 있는 몫은 적고, 정말로 뭔가를 생산한 사람이 가져가는 몫은 더 커져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경제활동은 너무나 복잡해서 누가 어느 정도 가치의 생산활동을 했는지 인위적으로 계량하고 거기에 따라 보상을 지급하는, 인간이 만든 기구로 경제활동 전반을 통제하는 방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걸 해보려고 했던 시도들은 모두 생산성 하락으로 귀결됐습니다. 따라서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돌아가게 두어야 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시장경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통제도 하지 않으면 한 곳에 (한 사람에, 한 집단에) 집중된 자본은 점점 큰 권력을 가지게 되며,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은 점점 노예와 같은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컨대 정부의 최저임금 규제가 없어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업들은 임금을 낮추고 "요만큼만 받아도 일하고 싶은 사람만 자신의 자유의지로 일하러 오세요!"라고 합니다. 더 나은 조건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을 빼고 그 조건에도 그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이 남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면 대다수 임금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겨우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형성됩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인류는 그 꼴을 다 보았습니다.) 더 알기 쉽게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면, 토지 소유자들과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들로 양분된 단순한 사회에서, 토지 소유자들은 소작농들에게 최소한의 생산물만 나눠주고, 최대한의 생산물을 자기 몫으로 차지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가능한 최소한만 사람의 몫을 남기고 가능한 최대의 이윤을 자기 몫으로 차지해 스스로를 불리려고 합니다. 자본엔 의지가 없지만, 자본을 소유한 인간이 이러한 의지를 실현하지요. 하지만 실제 생산활동은 지주가 아니라 소작농들이 했습니다. 자본은 생산하지 않으며, 사람이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생산물의 대부분은 생산자의 정당한 몫입니다. 그리고 그 생산자란 바로 우리들 대부분입니다. 노동하는, 생산하는 우리에게 충분한 몫이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의 질은 떨어집니다. 행복도도 떨어지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창의성도 도전 정신도 약해집니다. 충분한 몫을 챙겨 받아야 거기서 직업에 대한 존중도 수월하게 발생할 겁니다. 그 존중이 직업인의, 노동하는 우리들의 자존감을 키워줍니다. 그래서 저는 다양한 정책적 방법을 통해 노동하는 사람들의 권익을 지켜주고자 합니다. 우리 중 다수가 열심히 생산활동에 임하여 많은 부를 창출했다면 이 부는 바로 그 일한 다수에게 충분히 돌아가야 합니다. 소수의 일부가 그것을 너무 많이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일한 사람들의 몫이 일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제도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똑똑한 이들을 모아서 정책을 개발하겠습니다.


둘째, 기술 발전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더 윤택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게 사회체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 신경망 기반 기계학습으로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프로그램들은 세간에서 인공지능이라 불리며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를 활용한 다방면에서의 생산활동 자동화는 지금과 동일한 질과 양의 생산을 해내는 데 필요한 인간 노동의 양을 파격적으로 줄이게 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사람이 딱 한 명 있고, 이 사람이 농사를 지어 살아가고 있다고 쳐 봅시다. 이때 어느 날 농사를 지어주는 로봇이 등장합니다. 태양광으로 충전되고요. 그러면 이 사람의 삶은 엄청나게 여유로워질 겁니다. 남아도는 시간에 전에는 농사짓느라 못했던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할 수 있겠죠. 이게 바로 기술 발전과 자동화가 인류에게 가져다줘야 할 풍요입니다. 하지만 왜 실제로는 사람들이 기술 발전 때문에 불안에 떨까요? 바로 사람들이 경제활동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든 예시 상황에 등장하는 세상 유일의 인간은 경제활동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생산활동을 대신해 주는 로봇이 생산해 주는 것을 자기가 가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생산 활동자, 즉 노동자와 생산물의 주인이 따로 있고, 노동자가 생산한 것은 주인의 소유로 귀속되며, 노동자는 주인이 떨궈주는 것만 자기 몫으로 받아 챙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때 생산활동을 대신해 주는 로봇이 등장하면 주인은 노동자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고, 노동자는 주인에게 필요 없어질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청소 노동자는 청소 로봇이 등장하면 해고되어 실업자 신세가 되고, 돈을 못 벌어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우리가 경제활동의 주인이라면 청소 로봇이 등장했을 때 "아! 청소부로 일하는 동료 시민들의 일이 줄겠구나! 앞으론 로봇이 못 하는 일만 하면 되겠네! 축하할 일이다! 내 분야에도 빨리 자동화가 이뤄지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와닿지 않을까 봐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어느 생산공장에서 생산활동이 공장장부터 중간 관리자와 말단 직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맡은 바를 하여 이루어지는 공동 활동으로 이해하고, 생산물을 팔아 번 돈을 공장을 운영하는 모두의 소유로 간주한다면 (똑같이 분배되진 않고 업무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공정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되어 기존의 절반만큼의 노동시간으로도 같은 생산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 같이 "더 적게 일하고 똑같이 생산할 수 (벌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좋아?"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장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고용된 노동자이고, 수익의 주인이 공장의 자본 자체라고 볼 경우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반으로 줄면 자본은 임금 지출을 줄이고자 고용된 노동자의 절반을 해고하려 할 것입니다 (혹은 노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절반의 시급만 지불하거나). 우리에겐 이런 시스템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하지만 한 가족이 일구는 밭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신식 농기구의 등장으로 같은 양의 밭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이 반으로 준다고 해서 가족 구성원 절반을 추방하려고 할까요? 당연히 다 같이 적게 일하면서 같은 양의 수확을 얻고 새로 생긴 자유시간을 즐기겠지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간단합니다. 가족은 가족을 버리지 않지만, 자본은 노동자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노동자는 신식 기계의 등장으로 쓸모없어진 구식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이고, "우리"의 일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회가 함께 서로를 지켜주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살기 나빠지는 것입니다. 자동화로 인해 주인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노예가 도시에서 추방당하고 사막에 버려져 비참하게 숨지는 그런 시나리오가 아니라, 자동화로 인해 도시의 대다수 사람이 골고루 조금 덜 일 해도 기존과 같은 정도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가 가능해지게 해줄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아직 저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만, 장차 여러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싶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지금 인류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먼저 현명하게 풀어가는 문명이 장래에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7. 경제력은 곧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갖는 힘입니다.


존 레넌이 나라와 종교에 따른 갈등 없이 전 인류가 평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그린 Imagine이라는 노래를 내놓은 지도 오십 년 이상 지났지만, 여전히 나라라는 사회 단위는 엄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 지난 수십 년 동안보다도 더 그 존재감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안위에 더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국제 정치에 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국제 정치의 장에서 움직이기 위한 힘은 나라의 경제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경제력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다양하게 잘 생산해야 생깁니다. 석유나 리튬처럼 많은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자원이 많이 나면 좋겠지만,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다양한 제조업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으로 잘해 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중국의 제조-산업 역량이 무섭도록 발전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제조업도 두려운 경쟁 기업들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지지 않고 계속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생산물들을 내놓아야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치를 지킬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기술 개발이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높은 역량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하되, 종합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집중해 연구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끌어가는 건 결국 우리 중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훌륭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 환경의 개선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열 번째 단원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8. 실리적 균형 외교와 방어적 가치 외교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에 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재선으로 지금까지의 국제질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우방국들을 잘 대해주면서 대신 세계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제국적 패권을 누려 왔습니다. 물론 이는 우방국들과 미국 사이에 적절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상태였지요. 이제 미국은 조금 과장하자면 우방국 따위는 필요 없다, 너희는 우리의 짐 덩이일 뿐이다, 우리는 너희들 없이도 잘 먹고 잘산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희에게 제공하던 건 팍팍 줄이겠다, 꼬우면 너네도 우리한테 주던 거 줄이든지, 물론 그러면 나는 너희랑 더 멀어질 텐데 그게 감당된다면 말이지, 이런 식입니다. 미국이 주도했던 "서방 세계"의 연합은 국제관계를 철저하게 비즈니스처럼 다루는 트럼프의 시대에 위기를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 각국은 저마다 이런 정세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도 서둘러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적응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우리 편이었던 미국이 이제는 "한국? 몰라! 알아서 해!"의 태도로 일관할 수도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고, 각자도생의 아비규환에 다가가는 지구상에서 다양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조정하며 우리의 최대 이익, 우리의 안전한 살길을 창의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습관에 젖은 특정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와도 협력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실리적 균형 외교입니다.

*이 글은 2025년 2월 13일-15일에 쓰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세력 모두와 동시에 친하게 지내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뚜렷이 해 줄 것을 요구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앞서 제가 "우리"를 규정하는 최소한의 공통 기반으로 언급했던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교적 실리를 지나치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지지하고, 우리와 같은 입장인 나라들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내보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나라 주변의 모든 나라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체제로 움직인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위협받기 더 쉽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체제를 수호하고, 우리와 같은 가치와 체제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서로 협력하면서 공동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다른 가치관과 체제를 가진 나라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신정국가이든, 독재 체제에 지배되는 나라이든, 우리와 실리적 교역을 할 수 있다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대한 인권 유린 사태가 생기는 경우 등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가치를 천명하고 호응을 기대하는 발언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비슷한 민주주의 체제로 움직이는 나라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가 발생하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서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나라는 여러 민주주의 공화국 사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우방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고, 반민주적 체제를 가진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 도움을 받기도 쉬울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방어적 가치 외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9. 강한 국방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가 희미해지는 지금 우리의 자주국방 역량이 더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지난 반만년의 역사 내내 크고 작은 외부의 공격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모두 이겨냈습니다. 모두 이겨내고,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지금껏 간직해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기적을 이어가려면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물리적 실존을 지킬 힘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10. 내부 경쟁에 청소년과 청년의 생기를 다 써버리는 교육 시스템을 개혁해야 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힘을 결정짓는 경제력, 그리고 그 경제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 역량. 이것을 지탱하는 기둥은 명석한 두뇌와 그것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게 해 줄 훌륭한 교육입니다. 명석한 두뇌는 이미 있고, 지금 교육 과정도 내용상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문제는 과도한 국내 경쟁입니다. 제가 보기에 극도로 심한 경쟁은 우리 아이들이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이미 성장기부터 죽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뛰어난 사람들인데, 국내 경쟁에 힘을 너무 쏟아서 남는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심하면 저학년이나 유치원 때부터 과도한 공부 닦달에 시달리는 이유는 이미 앞서 언급한 직업 차별적 관념,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큰 소득 격차, 직업의 "높낮이"에 따라 달라지는 근무 환경의 현저한 격차, 이런 조건 속에서 강화될 수밖에 없는 최대한 위로 올라가려는 경향 등 때문입니다. 이러한 압력을 우선 완화해야 극단적인 입시 경쟁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 제도 자체의 조작만으로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시도는 항상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피로도 증가로만 이어지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예컨대 수시전형의 확대, 각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내신 평가의 강화, 다양한 평가 기준의 도입 등은 경쟁 압력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기에 학생과 학부모에게 그 모든 것들에 관해 자료수집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략을 짜야 한다는 압박감과 피로감을 주었을 뿐입니다. 어차피 빤한 경쟁 하는 거, 차라리 그냥 수능으로 통일해 달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결국 교육 개혁은 사회 전체적인 변화와 함께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11. 모든 주제의 유기적 연결


교육 개혁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강력한 경쟁 압력을 건드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처럼, 국방력 강화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출생아 수를 회복하지 않으면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될 뿐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그 기술을 사용해서 싸울 군인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며, 그 기술조차도 기술을 개발할 사람이 존재해야 실현할 수 있으며, 자원이 희소한 우리나라 특성상 거의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각종 자재와 연료도 우리가 강한 경제력을 지켜내야 계속 수급할 수 있습니다. 출산율 제고와 자살률 저감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고 절박하게 연관된 과제입니다. 이 과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의식 개선 운동과 노동 및 경제 정책 개선을 통해 사람들이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풀 수 있을 것이고요. 이런 해결책들을 실시하려면 크게 둘로 쪼개진 정파성과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통해 조성된 고립된 세계관 속에 갇힌 사람들이 끝없이 서로 멀어지기만 하고, 정치인들은 극단화된 사람들의 의견에만 신경을 쓰면서 같이 극단화 되어가고, 정치에 깊이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의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합의된 공통 지반 위에서 건설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다루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것을 감히 시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진 역량이 우리끼리의 소모적인 다툼과 경쟁으로 헛되이 불타버리는 대신 생산적인 협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발전에 쏟아부어질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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