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진보나 보수로 포지션을 잡고 떠들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뭔가 '옳은' 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가 '옳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옳음'을 보증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상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든, 외부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든 말이다. 그 참조점이 바로 아버지인 것이고, 방대한 양의 죽은 지식을 동원해 그가 '옳은 말'을 하려고 드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를 감추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 본문 중에서
소년 탐정 김전일이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를 보면, 주인공 김전일이 추리를 개시할 때 늘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라고 폼을 잡는다. 이것은 남성적 주체의 행동 전반을 지배하는 논리의 (이제는 좀 질리는 감이 생길 법도 한) 직접적인 표현인데, 이는 곧 아버지의 뜻(이라고 상정된 것)의 (대리)수행을 의미한다.
일찍이 키르케고르는 이 점을 제대로 꿰뚫어 본 바, 정말로 중요한 관계는 죽은 자와의 관계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죽은 자란, 이미 죽었지만 우리의 머릿속에서 아직 살아있는 바로 그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은 여전히 유령이 되어 강박증자의 행동을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노골적인 표현이 바로 <라이온 킹>에서 아버지 사자의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고전 중에서는 <햄릿>을 꼽을 수 있다.) 말하자면 (신경증이란 것이 매양 그렇듯) 강박증의 주체는 아버지가 벌써 죽어버렸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주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부재)은 늘 사태의 극단적 지점에서 폭로되고야 마는 법인데, 영화 <굿 바이 레닌>에 보면 가운데에 있던 문양이 제거된, 문양이 동그랗게 오려내져버린 DDR(구 동독)의 국기가 잠깐 나온다. 이것은 비단 이 영화에서만 발견되는 일은 아니다.
지젝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서두에서 동구권 변혁기의 '가장 숭고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라캉과 정치>의 결론에서 스타브라카키스가 다시금 환기시켜 주는 것은 루마니아의 차우셰쿠스 정권을 무너뜨린 반란자들의 깃발 사진이다.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이 잘려나가고 국기 중앙에 단지 구멍만 뚫려 있을 뿐인 국기다. 이 국기의 이미지는 이전의 주인 기표가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나 아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중간적 국면의 '열린'특성에 대한 현저한 표지다. 지젝은 이 이미지를 실재라는 구멍을 둘러싸려는, 정치적 재현의 공간 안에서 정치적인 것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시도의 가장 놀라우면서도 숭고한 표현으로 간주한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p.77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밤의 거미원숭이>에 실린 몇몇 단편에는 '도넛화化'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실려있다. 하루키는 현대인들, 그중에서도 꽤나 지적이라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특징을 놀라운 솜씨로 포착해 서술하면서, 그 현상에 도넛화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누군가의 도넛화를 발견하는 일은 사실 국기에 구멍이 뚫려버린 상황을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넛화한 주체의 맹렬한(?) 발화는 바로 '구멍을 둘러싸려는' 다급한 제스처인 것이다.
한국에서만 (아마도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재미있는 대중문화 현상 중에 '고자' 패러디의 범람을 들 수 있다. 유튜브에서 '내가 고자라니'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잘라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공산주의자 심영은 깡패 패거리에게 총을 맞아 고자가 되어버렸는데, 이 동영상을 '즐기는' 이들에게 있어 심영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고추를 잃어버렸다는 점인데, 이 사실 자체, 이미 남근이 없다는 사실의 폭로가 바로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니체는 '웃음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뒤집어서 '웃음은 진리를 암시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열에 걸려 억압되어 버린 진실이 건드려지면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인데, 고자 시리즈의 흥행은 아버지가 이미 고자가 되었다는, 아버지가 이미 거세되었다는, 따라서 우리도 '사실은' 남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는데서 촉발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미 죽어버린 상황에서 아버지의 질서를 지탱하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를 은폐하려는 이런저런 공작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공작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바로 냉소다. '나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서 뭐가 바뀌었다는 거지? 아무것도! 그러니까 나는 그저 살던 대로 사는 거야.'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논리—냉소주의를 은폐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기기만을 도입한다. 이는 '그것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임함으로써 그것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현실화된다.
가령 기존의 '정치'에 대한 지대한 관심, 죽은 학교에서 배우는, 삶에서 괴리된 죽은 지식들에 진지해지기, 혹은 죽은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 진지해지기, 기부활동에 탐닉하기, 식량 상품들의 안전성에 대한 병적인 예민함, 뉴에이지 류의 명상활동 등등. 이 모든 유사 행동들은 살 냄새가 진동하고 뉴런이 비명을 지르는 진짜 현실—구멍 뚫린 현실과의 대면을,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행동을 유예하거나 차폐한다.
인터넷에서 진보나 보수로 포지션을 잡고 떠들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뭔가 '옳은' 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가 '옳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옳음'을 보증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상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든, 외부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든 말이다. 그 참조점이 바로 아버지인 것이고, 방대한 양의 죽은 지식을 동원해 그가 '옳은 말'을 하려고 드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를 감추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의 구체적 수행은 상정된 적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라는 형태로 수행되곤 한다. 보수는 진보를 상대로, 진보는 보수를 상대로 끊임없이 싸운다. 벌써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세대라면야 예전부터 해오던 행동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고 넘어간대도, 젊은 세대의 그런 행동은 진짜로 공허하고 처절하다. 자신이 의지할 기둥-아버지를 필사적으로 찾아내고, 자신이 세운 기둥-아버지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들이 아버지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각성' 하기 전에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아버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허수아비 아버지를 진짜라고 믿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고, 이는 그들이 고자 시리즈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공허를 견뎌내는 대신 공허의 자리를 메꿀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그 허수아비가 진짜 아버지라고 빡빡 우기고 있는데, 그러는 와중에 자기 자신도 상처 입고, 다른 사람도 상처 입힌다. 자기 자신이 상처 입는 이유는 아무 의미 없는 세계에 내팽개쳐져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행동을 강요받는 데서 받게 되는 고통을 외면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이유는 그들이 그 공허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허수아비를 지키느라고 그 허수아비가 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자들, 세계의 불완전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리려 들기 때문이다. (못살겠다고 들고일어난 사람들을 짓밟기 위한 든든한 근거가 얼마나 많이 양산되는가.)
이 모든 비극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용기와 세상을 더 명료하게 파악하기 위해 활동할 준비가 이미 되어있는 이성을 통해 극복 가능한 것들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가 정치적 진리를 보장한다는 믿음과는 다르게 말이다. 인간의 뇌는 학습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뇌의 인풋과 아웃풋 사이에 있는 시스템은 불변항이 아니라 늘 변동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했을 때, 반사적으로 그 말을 반박하고 분쇄하고 싶어질 때,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인풋이 가해졌을 때 그 인풋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자동적 아웃풋을 습관적으로 내놓는 대신 자신이 도대체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지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씩 조금씩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의 신앙, 신앙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이다.
2012년 3월에 쓴 글인데, 여전히 유효한 점들이 있는 것 같아 올려봅니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때 폭력적으로 돌출한 젊은이들이 있었지요. 마지막에 회색으로 처리한 부분, 해결책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은 유보적•회의적인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