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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n 09. 2020

안녕,

pulling the trigger

'작성한 답변이 채택되었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평일 저녁에 N포털 사이트로부터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무려 2008년에 작성한 지식인 답변이 채택되었다는 알림이었다.


12년 전이면 한창 지식인 내공 쌓는 것에 승부욕 올라서 열심히 답변을 작성하며 나름 고수급까지 올라섰던 것 같다. 주 활동 분야는 간단한 영작과 번역, 인터넷 소설 추천, 그리고 유학생활 관련 질문이었다.


예고 없이 받은 메일 한 통으로 까맣게 잊고 지냈던 흑역사로 순간이동 되었다. 내 말투는 오글거리는 '~했심'으로 끝나기를 반복했고 묘하게 허세를 부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전형적인 중2병 말기 환자의 일기장 같았다.


이런 위험한 걸 인터넷에 박제해두고 잊어버렸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고 부끄러웠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과거의 흔적들을 신속히 삭제했다. 두 번 다시는 눈에 띄지 않았으면 했다. 몇십 개의 답변을 삭제하며 내공이 마이너스 몇 백을 찍고 있을 무렵, (작성한 답변 삭제하면 받았던 내공 배로 뺏어간다) 수전증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빠르게 삭제 버튼을 누르던 내 엄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저도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내가 쓴 답변이 맞나? 응? 내 꿈이 작가였나?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그 답변만큼은 민망함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무시한 체 정독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나 역시 작가 지망생이며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서 글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표현하면 부모님이 인정해주실 것이다. 함께 같은 꿈을 향해 노력하자고 답변을 했다.


부끄러웠다.


이번엔 틀린 맞춤법도 어설픈 띄어쓰기 오글거리는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난 남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당당하게 밝히는 당찬 아이였다. 하지만 현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꺼내면 혹시나 주변에서 비난하거나 조롱하지는 않을까,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을 사리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12년 전의 나는 자존감이 상당히 높았구나. 내 기억론 초등학교 4학년 말에 유학생활 시작과 동시에 다 잃어버렸던 것 같은데...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여전히 당당했구나. 근데 왜 지금의 내 모습에선 그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까.


물론 그 당시에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인터넷 소설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나는 누구든 쉽게 읽고 공감하며 재밌어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니면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터넷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를 상상 속에서라도 맘껏 펼쳐보고 싶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거창한 이유가 없었에 지금까지 그저 잊고 지냈던 쳐 지나가는 어린 시절의 수많은 꿈 중 한 개일 뿐, 딱히 특별하거나 애틋하진 않았다.


지난 12년 동안 난 대학도 졸업하고 여기저기에서 인턴도 하고 계약직으로도 근무하며 나름 바쁘게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나는 여전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청춘이다. 학생이란 타이틀을 벗어나 사회에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날 짓눌렀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현실파악하며 자신감을 잃고, 이루고 싶은 것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단단한 모래성이 파도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마냥,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었다.


팍팍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무기력해지고 방향을 상실해서 방황하던 내게 12년 만에 온 답변 채택 알림은 순수했던 시절의 나를 다시 떠올려 지치지 말고 새로운 도전로 한층 더 성장하라는 계시였을지도.


이렇게 평소의 감정, 소소한 일상과 추억을 글로 쓰다 보면 언젠간 불안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되어줄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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