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스토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Jun 19. 2020

너무 일찍 만나버린 호주

"어리니까 금방 친해지고 쉽게 적응할 거야" 정말 그럴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받았던 질문이 있다. 그리고 이에 한결같았던 내 답변을 정리해보려 한다.


"유정 씨는 어렸을 때 조기유학 가서 대학 졸업까지 있었잖아요. 조기유학 어때요? 우리 애도 영어 잘했으면 좋겠어서. 어릴 때 가면 확실히 금방 적응하고 쉽게 배우죠?"


"아니요."


너무나도 단호한 단답형에 의외라는 표정을 보였다. 물론 어릴 때 가면 영어는 늘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대 쉽게 배운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단순히 나 하나의 주관적인 의견이고, 유학 기간, 장소, 성격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으니 아래 글은 참고용으로만 봐줬으면 한다.




180도 바뀐 성격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인싸 중의 인싸였다. 1학기에 반장을 하면 2학기엔 아무것도 못해서 일부러 부반장 먼저 하고 2학기엔 반장을 하며 4학년까지 계속 완장을 찼다.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친해지친화력으로 반 아이들 모두와 편하게 지냈으며 선생님의 이쁨도 듬뿍 받았다.


호주로 유학 가기 직전인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등 기념일마다 내 책상 위에 과자들이 넘쳤고 실내화 가방 두 개에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지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문스럽겠지만 진실이다. 평생을 추억하며 살아갈 영광스러웠던 그 시절, 다신 오지 않을걸 알기에 못 이긴 척 믿어주면 고마울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이런 기념일을 바라보는 시선은 딱 한 단어다. 상술.


활발한 성향과 함께 난 호불호가 명확했고 고집도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날 독립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성격으로 애써 좋게 해석하셨는지 유학을 보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으셨다. 3년 터울인 오빠도 초등학교 5, 6학년 때 뉴질랜드에서 유학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교에 입학했기에 나도 당연히 보내주려 한 것이다.


아들과 달리 어린 딸을 멀리 혼자 보내는 것이 많이 걱정된 아빠는 반대하셨다. 그러나 자녀 교육은 엄마가 전적으로 맡으셨기에 아빠에겐 결정권이 없었고 난 그렇게 유학을 떠났다.


싱가포르 경유해서 17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낯선 섬나라, 호주. Australia. 스펠링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에 도착해서 공항에 들어섰을 때 평생 본 적 없었던 모든 인종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외국으로 왔구나. 여기가 호주라는 곳이구나.


학일보다 세 달 정도 미리 도착했던 나는 8주 동안 시티에 있는 어학원에 다외국인에 대한 긴장감을 없애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호주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역시 실전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주변 사람들한테 영어는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니까 무조건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 어렸고 놀림받는 게 무서웠던 나 역시 입을 닫아버렸다.


유학생이 많이 없던 시절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반 아이들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단정한 게 최고라며 홈스테이 이모가 젤까지 발라주며 묶어준 완벽한 올백머리 때문에 쏟아지는 시선을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촌스러워서 쳐다본 게 아닐까 싶기도. 여하튼 얼굴은 금방 붉게 달아올랐고 이를 눈치챈 선생님이 아이들의 시선을 돌려줬다. 친화력 하면 난데. 어떤 이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게 큰 장점이었는데 첫날부터 혼란스러웠다.


어른들은 내가 어리니까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금방 친해질 수 있다고 안심시켰었다. 그러나 쉬는 시간에 축구랑 농구, 술래잡기하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여자아이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웃 벙어리로 지냈다. 나를 놀리고 비웃는 말에도 웃고만 있던 시절이었다. 못된 애들도 많았지만 그때 내가 겉돌지 않게 늘 챙겨줬던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고마웠던 감정은 평생 갈 것 같다.


포스터를 만들고 발표하는 수업이 많았던 호주 교육방식 또한 내겐 공개처형과도 같았다. 맞지 않는 문법으로 쓴 글이 한 학기 내내 교실 벽에 붙어있어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생각보다도 더 비참했었다. 에세이를 쓰고 교실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내 발음이 놀림거리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호주 친구들이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는지 늘 위축되어있었다. 언어의 장벽이 내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었다. 항상 당당하던 내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금 저 사람이 속삭이던 내용이 나를 흉보는 건 아닌지 신경이 날카로워졌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자격지심과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애증의 관계


중학교에 들어가고서부터는 엄마랑 오빠가 호주유학에 합류하면서 아빠가 기러기 생활을 했지만 처음 2년, 초등학교 5, 6학년은 혼자서 한국인 홈스테이를 했다. 이미 한국에서부터 애늙은이 소리를 들었던 나는 홈스테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눈치도 100단이 되었다. 밥 먹을 때, 전기나 물 사용할 때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홈스테이 이모와 이모부(진짜 친척은 아니지만 이렇게 불렀다)의 기분을 살피며 내가 하고 싶은 행동보다 칭찬받는 행동에 집착했다. 점점 가식적인 면이 생겨났으며 착한 아이 증후군이 의심될 정도로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다.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해놓고 를 해소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괜히 편한 가족에게 화풀이한 적도 많았다. 더불어 반 친구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의미부여하 피곤하게 살았다.


호주 현지 학생들보다 두 배 이상 차이나는 학비를 내고, 비싼 보험에 홈스테이, 가디언 비용까지 상상 이상의 금액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나는 돈이라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부모님이 여유롭게 생활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지원해준 유학은 감사한 마음보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유학생활을 하며 만난 친구들은 '금수저'가 많았고 졸업 후 한국에 귀국하면 부모님 회사에서 바로 경영수업을 시작했기에 취업에 대한 부담감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 애꿎은 부모님을 탓하기도 했다. 난 나름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삭혔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을 대하던 내 태도에 알게 모르게 묻어 나왔고 부모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게 했다. 내가 불안정해서 겪는 혼란을 부모님께 책임전가 했던 철없던 그때의 내 모습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한 가지 더. 해외에서 오래 살았고 명문대 나왔으니 무조건 고액 연봉을 받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아직까지 완전히 떨쳐내진 못했다. 부모님이 눈치 준 적도 없고 유학 보내준 걸로 생색내거나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한테 투자한 돈을 돌려받을 생각도 없고 가능할 거라고 기대도 안 하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밥벌이만 착실하게 하면 된다고 말해주셨다. 여러모로 참 감사하고 마음의 부담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난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5년이 된 지금은 현실에 수긍하고 내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계속해서 줄여나가는 중이다.


다문화 국가로 잘 알려진 호주에서의 생활은 이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키웠지만, 나처럼 10년 이상을 이방인으로 살았다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오랜 해외생활로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순 있었지만 귀국 후 한국사회에 완벽하게 융화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못하고 어중이떠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귀국 1년 차에 인턴으로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외국물 먹은 티'가 난다는 소리를 들었고 결코 칭찬은 아니었다.


렇게 힘들었던 얘기를 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불편하게 바라볼 시선도 분명 있을 것을 알고 있다. 영어 실력 확실히 늘었고 국내에만 있었던 친구들보다 더 다이내믹한 학창 시절을 보낸 건 엄연한 사실이. 당연히 유학생활 전체가 암울한 것은 아니었다. 수능을 위한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배구, 필드하키 등 스포츠팀에 소속되어 같은 지역 학교들과 토너먼트 경기(Inter-school sports)도 하고 8년간 오케스트라와 콘서트 밴드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며 즐거웠던 추억도 많이 있다.


그래서 내게 유학생활이란 사막과도 같다. 생각만 해도 지치고 갈증 나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나 혼자 묵묵히 버텨내야 했지만 오아시스도 존재했다.




최선을 위한 신중한 선택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게 싫어하던 영어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의 큰 장점이 되었다. TESOL 자격증도 취득하고 영어과외도 지도해봤지만 가끔 나만 느끼는 영어 울렁증이 꾸만 나를 괴롭혔다. 영어로 대화하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예전에 비웃음거리가 되어 놀림받았던 때가 떠오르면서 얼굴이 쉽게 붉어지고 말을 더듬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이 밥 벌어먹고 사는데 큰 도움은 되겠지만 트라우마는 평생 극복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언젠가는 무뎌지기를 바랄 뿐. 양날검 무기 하나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기유학 자체에 반감은 없다. 단지 나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고 부작용을 겪었기에 모든 아이들에게 조기유학이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조기유학은 아이의 의견보다는 부모가 결정권을 갖고 진행하는 것으로 나중에 아이가 부모탓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녀 조기유학을 고민하는 분들께 늘 이와 같은 질문을 드렸다.


아이가 유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본인도 가고 싶어 하나요?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요?

아이 성격과 성향이 어떤가요?

아이가 금전적인 부담감 없이 생활할 수 있나요?

아이가 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 한국으로 급히 귀국하더라도 대응책이 있나요?




요즘 해외 한 번 나가보지 못했던 국내파도 유창한 영어실력을 뽐내고 있다. 부디 영어 하나만을 생각해서 성급하게 결정 내리지 말고 아이의 성향과 상황에 맞게 부가적인 결정사항을 모두 신중히 고민해줬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