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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r 11. 2019

명랑했던 선생 황현산을 생각하며

작가들의 친구, 나의 스승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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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같이 출판시장에 나타나, 식자층은 물론 일반 대중독자들에게도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첫 번째 에세이집(칼럼집) 『밤이 선생이다』(난다)는 2013년에 출간되었다. 물론 당시 이미 선생은 한국 문단에서는 작가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친구이며, 최고의 프랑스 시 번역가이자 연구자로 평가받는 학계의 큰 스승이었다. 십 수 년간 자신이 쓴 칼럼들을 묶은 이 책은 품 넓은 사회적 안목, 미학적·철학적 사유의 깊이, 서늘하고 수려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으로 한국 사회에 뜨거운 지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향은 책이 출판되던 시기의 사회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제도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시민적 삶의 사회적 형식이 안착되었다고 생각하던 한국 사회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상징되는 보수정부 집권기를 경험하면서 역사의 큰 후퇴를 경험하였고, 당시 사회적 위기의식은 극히 심화되었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당신이 써오던 칼럼들을 엮은 것이었지만, 현실의 관성을 이루는 다양한 차원들을 돌파하는 정신의 전위는 직면한 어둠의 현실에서 더 또렷하게 빛을 발했다. 그 책은 첨예한 예술정신이 참된 역사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며, 시의 윤리와 민주적 삶에 대한 사회비전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훌륭한 예시가 되었다.


지적 성의가 깃든 성찰을 통해 가십과 스캔들과 냉소주의에 불과하던 막장정치 현상들은 새로운 역사를 잉태할 서막의 변증법적 계기로 인식될 수 있었으며, 부조리한 삶의 일부거나 비극적 희생물에 불과하던 사회적 약자들은 미래의 씩씩한 주인공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문화의 관행들과 정치적 폭력에 염증을 느끼던 시민들에게 이 책이 큰 용기와 거짓 없는 위로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촛불 시민봉기에 의해 권력이 탄핵당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 고 노회찬 정의당 대표가 청와대를 예방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에게 이 책을 선물했던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지만, 이미 2013년에 남성 패션잡지 『GQ』는 선생을 추신수, EXO, 여진구, 이정재 등과 함께 올해의 남자로 뽑았다. 수려하고 진중하고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장이 미래의 비전을 껴안을 때 그 자체로 ‘힙’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흔치 않은 장면이었다.          


2018년 8월.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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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출간 이후 황현산은 시민들에게 ‘밤의 선생’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당신이 문학 수업을 받기 시작한 최초부터 ‘밤’을 문학의 중심으로 껴안았던 분이었다. ‘밤’은 선생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었으며, 연인이었고 텍스트였으며, 생명의 에너지가 잠재된 바다였으며 너머를 예비하는 변증법적 현실이었다. 인간과 문화의 무의식도 미래의 시간도 거기에 있었다. 선생은 평생 밤에 글을 썼으며, 밤에 깨어 있었고, 밤을 꿰뚫어 보았으며, 밤에 감싸여 있었다. 노동과 계약과 선명한 논리로 기워진 낮의 세계에서조차 그는 밤의 그림자를 보았으며, 낮보다 생생한 현실이 밤에 있다고 생각했다. 선생이 평생 번역하고 연구하고 강의했던 프랑스 시와 그가 각별히 애정을 쏟았던 한국 시인들도 그에게는 밤의 천사들이었다.


화가 파울 클레가 ‘이미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 가운데에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했던 말을 참조한다면, 밤은 선생에게 그 ‘가운데’에 속하는 영토였다. 연약한 것, 작은 것, 섬세한 것,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변방에 있는 것, 아직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것, 핍박받고 억압받는 것, 희망의 모양을 갖지 못한 것, 역사에 등재되지 못한 것, 지금 시간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모두 밤의 영토에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거기에서 바위를 부수는 꽃잎의 생명력을 보았고,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읽어냈으며, ‘얼굴 없는 희망’을 감지했다. 선생이 펴낸 책 제목처럼 당신의 평생 글쓰기 자체가 어쩌면 그 얼굴 없는 희망의 현시이자 실천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이상집.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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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글을 써온 작가이자 스승이었던 선생의 글 중 어느 하나를 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특별히 인상에 남는 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평론가로서 선생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글 중 하나로 기억되는 평론은 한국인들에게 흔히 교과서 문학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육사의 시 「광야」에 대한 평론이다. 이 글은 1990년대 『현대시학』에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까’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던 글 중 하나였는데, 이후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에도 실렸고, 약간의 해석적 보충을 더하여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에도 실렸다. 너무나 유명한 시이기에 실은 제대로 해석된 것이 없기도 하다는 전제를 깔고서, 선생의 글은 첫 연의 ‘하늘이 처음 열리’는 때와 마지막 연의 ‘다시 천고의 뒤’를, 그리고 역시 첫 연의 ‘닭 우는 소리’와 마지막 연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연결 짓는 놀라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러한 연결의 중요한 근거를 이 글은 ‘천지개벽’이란 단지 닭 우는 소리로 상징되는 자연의 시작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개입을 통해서만이 완성될 수 있는 공동작업이라는 관점에서 찾는다.


 선생은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도 지배-종속 관계로도 보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동류의 것이라는 식의 낭만 인식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우주적 진화를 위해 협력 하는 관계로 보았다. 이 글은 근대의 계몽주의나 기술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수락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노동과 실천을 존중하고 역사의 가능성을 긍정했던 선생의 태도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또 연구와 평론과 번역과 강의와 에세이를 모두 역사에 대한 실천적 개입이라고 생각했던 선생의 글쓰기 태도를 압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이 실천과 태도가 드러내는 바는 그의 글쓰기가 ‘미래’에 사는 글쓰기였다는 사실이다. 난 개항기 이후 시작된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선생의 글을 한국어 문장으로 쓰인 가장 깊이 있고 보편적인 사유 중 하나라고 늘 평가해 왔는데, 이 깊이와 넓이는 그의 글이 미래로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문학 영역을 넘어서서 시민들에게 황현산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동시에 시민들을 깊이 감동시키고 마음을 다독였던 글로 「삼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한겨레신문, 2009. 5. 28)라는 컬럼은 극히 인상적인 글 중 하나였는데, 이 역시 미래를 향해 열린 선생의 문학적 비전을 잘 보여준다. 한국현대사의 끔찍한 정치적 비극으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이 사태에 처해, 선생은 고 노 전 대통령의 유서에서 ‘운명이다’라는 글귀와 ‘작은 비석 하나만 세우라’는 글귀를 시적 긴장이 깃든 문장으로 읽었다. 이 글귀들에서 선생은 오욕으로 뒤덮인 한 정치인의 육신이 희생을 스스로 수락함으로써 패배주의 없는 운명을 결단하는 모습을 읽어냈으며, 그 자신이 미래의 표지가 될 수 있다는 역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한 존재의 숭고미를 읽어낸다. 현실의 비극에서 인간의 자유를, 오욕에 현실에서 다른 시간의 잠재성을 예감하는 선생의 해석은 정치의 현실을 시의 비전과 겹쳐놓으면서, 우리 사회가 극히 예외적인 방식의 칼럼니스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러한 특별한 칼럼들은 평생직장이었던 고려대학교를 정년퇴직한 후 집중적으로 쓰이면서 수많은 명편들을 남기게 되었는데, 제도정치의 후퇴로 인해 한국사회의 위기가 총체적으로 심화되던 시기였기에 그 글들은 더욱 큰 존재감을 발휘하였고 시민사회에 매우 큰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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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운이 좋게도 선생과 많은 시간을 나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선생의 수업을 들었던 것은 물론이다. 대학원 수업의 경우는 이름이 알려진 시인들이 청강을 하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올라와 참석하는 일이 많았다. 대개 작가들이 평론가를 놀리면서 ‘작품을 못 쓰니 평론한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 얘기는 선생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학부 때나 대학원 때나 그 수업의 특징은 짧게 끝난다는 것이었다. 수업은 선생의 글쓰기 비슷했다. 나지막한 소리로 한 편의 시를 조용히 낭독하시고는 ‘여성적’ 걸음걸이로 몇 걸음 좌우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생각에 잠시 잠기시다가 이내 말씀을 시작하셨다.  


 학자의 이론으로 강의하는 법이 거의 없었던 선생은 당신의 기억 속에 있던 어떤 촌부 얘기, 선생이 자라던 시골의 염전 얘기, 한 젊은이의 실패한 연애담, 당신의 성장 과정에서 본 아이들의 흥미롭고도 잔인한 습성, 구전가요와 민담, 도시의 어떤 풍경 속에 찰나적 실루엣, 한 소설가의 작품 속 불행한 주인공 얘기, 친하게 지내는 시인의 어떤 특이한 습성, 당신의 생활습관 등을 이야깃거리로 꺼내셨다. 조금은 사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사사롭게 일상적이지는 않으며, 보편적이지도 지만 특수하다고도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들으며, 학생들은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선생의 수업은 비의를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시간 같았다. 그러다가 선생은 갑자기 시로 들어와 그 얘기들에 담긴 소망과 미움과 분노와 슬픔과 상처와 사랑과 열정이 그날 수업 대상이었던 시에 담긴 '빠숑(passion)'과 다른 것이 아님을 환기시켰다. 선생은 그렇게 시와 나날의 삶, 예술과 역사, 시인과 민중, 이야기와 노래, 문학과 정치, 과거와 미래를 포개고 대질시키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그리고 수업은 공식적 수업시간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끝이 나곤 했다.


수업의 진행 프로세스는 어떤 면에서는 과격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다사롭고 은밀했다. 행간과 여백과 메타포가 많았다는 점에서 시적이었던 그 수업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거의 없는 수업이었다. 평생 연구하고 번역하고 강의하셨던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세상에서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으며 온갖 오해와 왜곡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괴팍 이론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선생의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그것이 땅을 일구는 농부의 기도, 매일 기계와 씨름하는 일용노동자의 희망, 어느 날 한통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은 고아원의 아이가 문득 본 꿈과 다른 것이 아님을 할 수 있었다.           


시와타이포잔치 2017.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이상집. 2017년 7월

  


5


한국문학사 전체를 통틀어서 선생만큼 시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평론가가 몇이나 있었을까. 문학평론가와 번역가들에게 선생은 탁월한 선배이자 존경받는 엄격한 학자-스승이었지만, 시인들은 당신을 ‘벗’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이를 막론하고, 신인과 중진을 막론하고, 선생이 시인이라는 존재를 끔찍하게 존경하고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선생은 시를 논문용 '텍스트’로 보지 않았다. 시인을 사물화된 연구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선생은 시와 시인을 존재의 순결한 형태로 보았으며, 삶과 역사의 생생한 실천 양식으로 여겼다. 그래서 선생은 시인의 가면을 쓴 사이비 예술권력과 시적인 인간을 늘 엄격하게 구분했다. 선생은 ‘문단’이 아니라 ‘시의 공동체’를 사랑했다. 평론은 그들의 존재론 바치는 경의의 표현이었으며, 성의와 긍지를 다해 그 순결한 공동체의 잠재성을 세상에 드러내고 정치와 역사 안에 기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선생의 평론은 아름다우면서도 치열한 해석적 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을 삶의 실재와 분리시키는 죽은 아카데미담론과 행정 체계와 싸우면서 ‘시를 구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선생을 일생 동안 추동시켰다. 권위적인 전통 문학담론으로 수용되지 못하거나 이해받지 못했던, 때로는 비난받기까지 하던 많은 작가들이 선생의 해석 투쟁을 통해 한국문학사의 중심으로 초대되었다.


 관련이 없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선생의 감수성과 존재 이해를 엿보았다고 여긴 특이한 개인적 에피소드가 있다. 선생은 나에게 밤에 늘 글을 쓰다가 아침에 잠들어 대낮에 일어나 생활하는 당신의 패턴에 관해 얘기하다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선생은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강의가 있는 날에는 그 직전에 사우나에 가서 몸을 씻으며 정신을 환기하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단다. 그런데 아침에 잠들어 대낮에 눈을 떠서 사우나에 가면 사우나는 비어 한가한데, 그때 이 사우나의 이용객은 낮에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선생이 이용하는 사우나는 조폭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어느 날 선생은 사우나에서 온몸에 용 문신을 한 젊은 조폭의 문신을 보고 매료되어 그의 몸을 쓰다듬으며 “문신이 아름답군요” 했다고 한다. 누구도 제 몸에 손을 대기를 꺼려하거나 두려워했을 이 조폭은 선생의 느닷없는 손길에 처음에 깜짝 놀라다가 허리를 굽히며 ‘어르신, 멋지지요,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오히려 인사를 건네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몇 사람이 없던 사적인 대화 자리에서 선생으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는데, 그 순간 선생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마치 선생의 시 수업에나 나올 법한 이 에피소드는 무언가 독특하고 극단적인 것에 이끌리며, 거기에 이끌려 조금은 위험하고 무모해 보이는 행위를 도발하는 선생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신 자신이 곧 ‘예술가’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이끌림과 행위의 저변에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누가 조폭의 문신을 ‘아름답다’고 인정할 것인가. 그 인정은 문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정이기 전에 그 문신을 아름답다고 여긴 조폭의 미의식에 대한 인정이며, 그 미의식을 제 몸에 새긴 조폭의 욕망 또한 한 ‘정상적’ 욕망이라는 존재 긍정이다. 통속적 관점에서 이해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말과 생각과 욕망이 이 문신과 다른 것이 아니며, 어쩌면 사회와 정치와 역사에서 ‘정상성’의 규정들로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고 억압받는 온갖 소망들이 이러한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은 문학을 재판관이 되기 위해 배우는 법전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경험의 형식이자 그 자체가 존재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그 평론이 지성적 논리를 넘어선 깊이와 낯선 아름다움을 갖게 되고, 그의 글이 감정에 호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에게 쉽게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원의 정신적 위로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존재 긍정에 바탕했기 때문이다.     


시민행성: 김혜순 시집 낭독회. 와우북페스티벌 2016.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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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신비주의에 의존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글은 지성의 논리를 넘어서 독자에게 더 큰 섭리와 조우하는 시간을 제공하면서, 문장을 읽는 경험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좁은 세계를 다시 확인하는 일과는 다른 일임을 보여주셨다. 다시 말하건대 황현산의 글쓰기에서 그것은 역사가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며, 미래를 미리 사는 자의 용기를 드러내는 일이며, 존재를 수용하는 긍정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시대가 ‘세월호’라는 비극을 맞았던 시기 나와 했던 인터뷰에서 선생은 이 시대의 ‘행복’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명랑’의 윤리를 제안하신 적이 있다. 대략 이런 요지였다.


“명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명랑하다면 그는 존재의 비극과 약점과 결점을 자각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힘과 긍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 주저 앉지 않고 주위를 활기 있게 만들려는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통해 다른 미래를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명랑은 어쩌면 예술이 지닐 수 있는 유희성 중에서 가장 멋있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선생의 평생 글쓰기와 삶이야말로 명랑의 유희성을 드러낸 전범이었다고 생각한다. 학자로서 번역가로서 엄격했지만, 선생은 평생 ‘꼰대’인적이 없었으며 허식이 없었고, 대신 늘 유머가 있었다. 촌철살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셨지만, 존재를 깊은 곳으로부터 긍정하게 하는 화법으로 사소한 시민의 일상조차 역사적 가능성의 일부로 전환하려고 애쓰셨다. 수십만 팔로워를 지닌 선생의 트위터 계정이 진심한 애도로 뒤덮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북 문인사 기획전: 황현산의 N가지 스펙트럼. 함돈균.황현산.이수명.이영광. 2017


선생과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병원에서였다. 이미 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 고통을 내장하고 계셨지만, 선생은 가능한 평안한 얼굴빛을 잃지 않으시며, 두 마디 말을 건네셨다. “함 선생, 준비하는 그 일(새 학교)은 잘 되고 있어?” “내가 병이 나으면 그 학교 이사장 할게.” 내가 준비하고 있는 새 학교 이름은 ‘미지행’이다. 당신이 지어주셨다고 할 만한 이름인데, 예전에 학교를 만들면 이사장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날 마지막 말로 대답을 해주신 것이다. 미래를 여는 긍정의 힘을 실어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당신은 밤의 선생이었지만, 그 밤은 늘 명랑했다.               



《자음과 모음》 2019년 봄호

자음과 모음 2019년 봄호






함돈균

문학평론가.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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