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아이러니와 타인의 얼굴들
매일 같은 시각 은하철도999
여의도 증권사에 다니는 10년 차 직장인 37세 K의 집은 강동구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그에게 집 근처 역과 직장 근방 역 사이에는 스무 개가 넘는 정거장이 있다. 매일 아침저녁 왕복 마흔 개가 넘는 정거장을 오가며 그는 10년 동안 회사를 다녔다. 일주일에 200개 이상의 정거장, 한 달이면 800개 넘게 오고 간 정거장 수는 10년을 합산하면 10만 개도 넘는다. 은하철도999를 탄 것도 아닌데 10만 개 정거장이라니! 혼자 쓸쓸한 명절을 보내던 K는 어느 날 자신이 오간 정거장 수를 문득 할 일 없이 헤아려 보다가 놀란다. 그래도 그는 곧 스스로 위안한다. 그나마 갈아타지 않고 직장까지 직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서울의 동과 서를 쏜살 같이 횡단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 K의 출근길의 아침 지하철이 목적지까지 닿는 시간은 평균 53분이다.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 게이트를 빠져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 역사에서 회사 엘레베이터까지 다시 종종 걸음으로 5분. 그러므로 그가 생존을 위해 사수해야 할 마지노선은 오전 8시의 지하철 플랫폼이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중략)....가까스로 문이 닫히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였다”
- 박민규,「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에서
기다리던 오전 8시의 열차('뜨거운 차')가 들어온다. 일단 오전 8시의 열차는 그에게 반갑다. 그러나 다시 그는 착잡해진다. 서울의 직장인 K에게 적어도 오전 8시는 “신체의 안전선”과 “삶의 안전선”이 분할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착잡한 마음을 사색으로 연결시킬 겨를도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하지만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문득 K는 예전에 서울 지하철 출근 시간 혼잡도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지하철 한 칸의 승차정원은 대략 160명, 좌석은 54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 출근 시간 강남역에 내리는 2호선 전철 한 칸의 승객수는 350명 정도라고 한다. 이 시각 나는 사람인가, 짐인가. 그가 몸을 싣는 지하철 5호선이 사정이 조금 낫다 하더라도 K에게 매일 오전 8시는 이런 자문의 회귀가 불가피한 시간이다.
‘삶’과 ‘사람’의 아이러니
도시의 오전 8시는 이런 방식으로 ‘신체의 안전선’과 ‘삶의 안전선’ 사이에 분열을 초래한다. 이때 분열되는 것 중에는 ‘말’도 있다. 본래 ‘사람’이라는 명사는 ‘살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사람’은 처음부터 ‘고양이’나 ‘개’처럼 대상을 지시하는 호명이 아니라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도시의 오전 8시 지하철은 ‘살다’의 온전한 품격을 증발시킴으로써 ‘삶’이라는 풍성한 지평을 단순한 생존 영역이나 경제적 생활세계로 몰아넣는다. 그나마 거기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마저 ‘삶의 안전선’으로부터 분리한다. 이 말의 분열, 동사와 명사의 분할과 긴장, 행위와 행위 주체 사이의 간극에는 인간 ‘다움’이나 삶 ‘다움’이라는 가치 증발, 본질이나 목적이 되어야 할 삶과 도구적 생활방식 사이에서 발생한 전도 현상이 내포되어 있다. ‘삶의 안전선’에 전력질주로 올라타고 “문이 닫히면” “유리창에 밀착”되고마는 저 소설 속 오전 8시의 ‘얼굴’은 지금 세계의 글로벌 스탠다드다.
이 분열의 시계침이 지시하는 철학적 함의는 삶의 주체이자 공동생활의 전체 지평을 구성하는 행위 개별성의 신체가 깨어져나간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목적으로서의 삶은 수단으로서의 생활로 격하되며, 부조화하며 삶의 궁극적 종합, 변증법은 불가능하게 된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앙리 르페브르에 따르면, 오늘날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높은 수준의 긴장은 헤겔의 생각처럼 지양(종합)되지 않는다.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갈등은 최종적인 것을 향해가는 진화 과정이나 정상적 상황에서의 일시적 일탈적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적 삶은 이 불가능성 자체를 자기 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는 긴장과 분열로만 유지 가능한 이 시대 삶의 ‘정상성’을 ‘현대성의 아이러니’라고 불렀다.
다른 얼굴들의 같은 얼굴들
그러나 이 아이러니를 다른 식의 역설로 바꿔 이야기 할 수도 있으리라. ‘하나’의 분열은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변질시킨다고 말이다. 예컨대 오전 8시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K는 세상의 수많은 ‘다른 얼굴들’을 마주한다. 아직 의식이 충분히 깨어나지 않은 오전 8시, K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다른 얼굴들의 존재에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단 마주 확인한다. 마주하는 얼굴 수만큼이나 그들의 손금도 다양할 것이다. 손금이 지시하는 삶의 모양들도 제 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지하철의 오전 8시라는 시각 K는 타인의 얼굴들과 마주하여 또 다른 아이러니를 느낀다. “가까스로 문이 닫히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인 K의 지하철 오전 8시는, 타인의 수많은 얼굴들을 모두 그런 유리창에 밀착된 똑같은 얼굴로 마주하게 되는 이상한 시간이다. 발걸음은 초조하며 일사불란하다. 지하철로 빌딩으로 도저히 방향을 거슬러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군중의 흐름은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피로감 속에서도 이름 모를 적의로 무장한 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K는 타인의 얼굴들에서 또 다른 타인의 얼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도 그 얼굴들의 흐름에서 구별되기 어려운 얼굴들 중 하나이리라 추측해 본다. 개별자들에 붙은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닌 타인들은 이 흐름 속에서 열차 속에서 동일한 ‘하나’가 된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선언을 흉내낸다면 ‘모든 개별적인 존재는 지하철 출근 시각 공기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린다’
문화와 사회의 규율이 온전히 신체와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는 찌뿌둥한 표정의 오전 8시는, 삶의 안전선과 조화되지 못한 도시의 개별적 신체들이 온전히 사회적 페르소나를 쓰지 못해 방심해 있는 시각이다. 그래서 도시의 민낯이 방심의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과 과학에서 찾는 물리적 세계의 원리인 ‘하나이면서 모든 것(hen kai pan)’은 오전 8시에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역설로 삶의 개별성을 생활 속 ‘같은 것’으로 흡수해 버린다. 타인의 얼굴들이 모든 타인들과 마주하여 서로의 거울이 되는 도시적 삶에서 나의 얼굴도 타인의 얼굴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이상,「오감도시제일호」)가 함께 모여 있으며 또한 구분되지도 않는 이상의 아이러니한 시는 오전 8시 열차역 플랫폼에서 씌어졌는지도 모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융합대안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연구디자인센터(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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