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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y 08. 2018

서른 살

서럽고 설익고 낯설은

서럽거나 설익거나 낯설거나


불가리아의 언어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말의 본질은 음성, 즉 소릿값이다. 소릿값에는 문화 고유의 메커니즘에 의해 말뜻이 분절되어 자리 잡히기 전 ‘질감’이 존재한다. 소리에는 물성이 있다는 말이며, 그 물성은 문화라는 인공적 기제가 개입하기 이전의 것으로서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형성한다. 문득 ‘서른 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다가, 이 단어의 소릿값이야말로 이상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은 ‘서른’과 ‘살’이라는 두 단어를 합친 복합어지만, 이 두 단어의 결합은 좀 특이한 인상을 자아낸다.


‘서른’ ‘서른’ ‘서른’......이라고 입으로 몇 번 계속 소리 내어 보자. 단지 30이라는 수가 아니라 ‘서러운’이라고도 들리고, 밥이 ‘설다’(설익다)고 할 때 ‘설은’으로도 들리지 않는가. 또다시 들어보면 ‘낯설다’ 할 때 ‘(낯) 설은’으로도 들린다. 말장난 같지만 저 언어철학적 통찰에 따르면 ‘서른’의 의미에는 부지불식간에 이 소릿값 모두가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나이歲)’이라는 단어와 결합된 ‘서른 살’은 ‘서른’이라는 소릿값의 물질적 복합성을 특히 잘 보존하는 듯하다. 내게는 ‘서른’과 결합되면서 ‘살’이라는 말이 종종 몸을 뜻하는 단어인 ‘살(flesh)’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그때 나는 ‘서른 살’을 ‘서러운 몸’이거나 ‘설익은 몸’이거나 ‘낯선 몸’으로 연상하곤 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 <서른 즈음에> 중에서


가수 김광석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도 20년이 훨씬 넘었다. 갓 서른 살이 넘어 요절한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고 해봐야 쉰 살이 조금 넘는다. 인생의 중년을 살아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이 젊은 음유시인은 ‘서른 살’을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 “매일 이별하며” 사는 시간으로 체험했다. 이 시간 체험의 이미지는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표현된다. 서른 살은 내 몸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열망이  몸 바깥으로 한숨처럼 허탈하게 빠져나가는 경험이며, 강렬하게 체험되었으나 곧 실체 없이 허공에 사라질 덧없는 연기처럼 연상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서른 살이란 “떠나간 내 사랑”의 “기억”의 시간이었으므로.


인생의 긴 시간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청년에게 서른 살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에 버금갈 만큼 혹독한 상실감이 응집된 무대다. 그래서 그에게 서른 살은 ‘서러운 몸’을 사는 시간이다. 이 상실된 사랑은 그 자체로 서른 살이라는 ‘청춘’의 메타포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인생의 나침반을 바꿔 놓는 듯한 이 지독한 상실의 체험을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떤 회고적 시선으로, 요즘 식으로 말해 '쿨한' 감성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겪는 통속적 일상사에 대한 그의 노래가 '시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저 감수성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이별이 일회적인 불행이 아니라 “매일” 지속되고 반복되는 삶의 시간으로 추체험된다는 사실이다. “조금씩 잊혀 간다”라고 말하지만, 노래하는 동안 기억은 지속된다. 이것은 무감각이 아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노래의 역설은 노래 속에서 사랑의 시간이 반복되어 재생되고, 그런 의미에서 노래하는 이가 사랑의 시간을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라는 시구와 저 노랫말 속에 담긴 체험의 혹독함과 진지함이 크게 다른 성격의 것일 리 없다. 요즘 세태에서는 ‘쿨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시대의 트렌드처럼 되어 있으나, 상처를 사랑의 시간으로 되돌리며 "매일 이별하며" 다시 사는 ‘서른 즈음에’의 기억 작동 방식이야말로 그 시간이 지닌 진정한 '능력'일지 모른다. 끝까지 가는 처연함이라고 해야 할까.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나는 엄마,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 ……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당신, 왜 그래? 헝클어진 당신이 묻는다.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나는 천천히 당신을 올려다본다.

당신도 어딘가를 올려다본다. 답을 구하는 태도는 누구나 유아적이군요. 그런데, 구른 건 정말 바퀴뿐이었을까요?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나는 방향을 틀기 위해 잠시 후진을 해야 한다. 천천히 핸들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 김행숙,  「삼십 세」 중에서   


화자는 서른 살을 ‘나무에 들이 박은 자가용’의 감각으로 체험한다.  이 독백에는 현재와 과거 회상이 동시에 섞여 있다. 현재 상황은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인 상황이다. 이때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이유는 교통사고가 나는 절박한 위험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 그의 절대적 보호자였던 유모차를 밀어주던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른 살은 엄마가 밀어주던 유모차가 내가 모는 자가용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삼십 세’는 “핸들에 손을 얹고” 도로의 표지판을 살피며 자기 스스로 도로를 운전해야만 하는 인생의 시간이다. 삼십 세라는 표지는 주체성의 표지인 동시에 불안함의 표지이기도 하다. 혼자 달리는 도로는 ‘낯설고’ 운전 능력은 아직 ‘설익’다. 손수 운전을 하다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사고를 낸 그 곁에 엄마를 대신한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내가 쥔 인생의 핸들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엄마'와 '당신'은 전혀 다른 존재 위상을 가지므로. 어떤 의미에서 내 곁에 있는 존재가 아무리 가까워도 엄마처럼 절대적 보호자가 되어주지는 못하는 타인 의식을 갖게 되는 시기가 서른 살이다. 주체성은 고독하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서른 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선택한 인생에 어렴풋한 방향성이 생긴다. 하지만 길은 낯설다. 길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 길이 어디에 닿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게다가 많은 경우 내가 도로를 선택하여 운전한다기보다는, 도로에 맞추어 운전하는 ‘기사’가 되기 시작하는 게 이 시간이기도 하다. 10대나 20대와는 달리, 삶의 전체적 방향이나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율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인생의 누추함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인생 시간대도 이 즈음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구조적 인식은 곧 주체성의 허위와 무력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이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라는 식의 당황스러운 질문들이 나를 엄습하게도 되는 시간.   

   


시인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 세」)고 말했다. ‘서른 살’이라는 시간이 지닌 모호하고 모순적인 성격에 대한 솔직한 직관이 담겨 있다. 서른 살이라는 시간은 시작이고 이별이며, 설렘이고 불안이다. 자발적 선택과 비자발적 선택이 섞여 있고,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봄이면서 여름이며, 김광석처럼 가을에 문턱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감성적 분기점이기도 하다. 아이의 천진한 웃음과 어른의 사회적 마스크가 공존하는 무대다. 한 소설의 주인공은 “나는 어째서 언제나 어중간하고 타협적인 것일까?”라고 질문하다가, “멋지게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이장욱,『천국보다 낯선』)라고 자못 다시 비장하게 결심한다. 성찰적 자문과 자기 정당화를 하는 자가당착적인 자답이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주인공의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지만 최승자는 이 시간에 대해서도 얼굴에 “철판 깔”고 변명하지는 말자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행복행복행복한 항복”을 하게 되는 서른 살의 ‘항복’ 역시 결국 나의 선택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말이다.




* cover image: Marcel Marceau  

** 알베르 자코메티, <서 있는 아네트>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융합대안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연구디자인센터(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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