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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동 Jan 02. 2024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

촬영장에서.

오늘 우연한 기회로 '고려거란전쟁' 촬영장에서 일했다. 애매한 직업을 몇 개를 가져서 하게 되는 일 중에 하나가 연극, 영화, 드라마 촬영 현장일이다. 촬영장 스탭과 배우들의 연령대는 매우 다양하고, 분야도 무척 세분화되어 있다. 나에겐 출연자 모두 같은 '배우'인데, 보조출연자, 배우, 이미지단역, 액션 배우, 주연 배우, 조연배우 등 아직도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처음 촬영 현장에서 느낀 건 에너지였다. '배우 아우라'라고 부르는 그것과 다른 현장 본연 에너지. 기본 에너지 '+-0'에 수렴하는 나로선 그들은 종교 같기도 했고, 자기들만 아는 특별한 무안단물 포션을 공유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아무리 직업의식이 투철해도 이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몇 번 현장을 다니면서 내린 결론은 스탭, 배우 할 것 없이 지독하게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에 마취되어 각자의 꿈을 맹렬하게 사는 사람들. 그들은 쉬이 지치지 않고, 상식적으로 불가능 한 뭔가를 빠르게 만들어 내고, 심각하면서 동시에 유쾌하고, 촬영이 끝나면 꿈을 먹었는지 먹혔는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초연해지는 사람들.


'나는 다신 이래 못한다.'


를 매번 현장에서 다짐하고, 퉤 퉤 퉤 하고 돌아서지만 정신 차리고 나면 포스터나 엔딩크레디트에 이름을 또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이름 없이 일한다. 심지어 무페이로! 대중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다거나 그 길로 나가 뭔가를 이루겠다는 꿈도 없는데 말이다. 꼭 남의 꿈에 휩쓸려가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정신 차리고 보면 현장이다. 오늘은 문경 산속 야외 세트장에서 6시간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피가 어는 느낌이었는데, 나 빼고 모두들 오늘 날씨가 도와서 쉽게 촬영했다고 한다. 심지어 큰 현장과 사극이라는 장르가 처음이라 엄청 혼자 어색해서 무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는 이름 모를 싸가지'로 얼어 있었다. 집에 도착한 지 세 시간이 지났건만 얼었던 얼굴은 홍당무로 변해있다.


내 꿈은 이곳이 아닌데, 또 가게 될까?

아니, 실은 나는 딱히 원대한 꿈이 없는데 이렇게 꿈 먹고사는 사람들 옆에서 '남의 꿈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도 되는 걸까?

아! 꿈이라는 건 꼭 있어야 하는 건가?


여전히 얼어버린 뺨이 화끈 거린다.

꿈에 모든 걸 태우는 현장 사람들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도 화끈 거린다.


마지막으로,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이 있는데, 그도 매 순간 활활 태워버리는 곳이라 왠지 모르게 오버랩되는 건 잠 안 잔 지 24시간이 지나서 오는 착시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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