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아니 하나님!
“나는 가끔 그 할머니가 할머니의 탈을 쓰고 인간을 테스트하러 내려 온 천사라는 상상을 한다?”
꽃집 영업이 끝나고 홍대 부근 집까지는 걸어서 40분. 운동 겸 걸어가는 길에 남자친구에게 메신저로 말하기 벅찰 정도의 스토리가 있다면, 혹은 손가락이 입을 따라가지 못 할 때면 바로 전화를 걸어서 말을 쏟아내곤 했다.
언제였던가,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말 많은 내가 지치지 않냐고 흔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말이 없기 때문에 말이 많은 네가 좋다.’라는 ‘정답’을 말했다.
“아하하. 진짜 네 상상력은 짱이야. 역시 MBTI N의 힘인가.”
2023년 현재 기준, 한 풀 꺾였을 수도 있지만 내 남자친구는 여전히 MBTI에 푹 빠져있다.
적어도 만나고 1년 차 까지는 MBTI가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우린 안 맞다’며 ‘헤어지자’를 연발하던 내가, 어느덧 만난지 4년차가 되어가서인지 아니면 ‘우리는 안 맞는 게 아니라 MBTI가 달랐던거구나.’하고 내가 깨달은 뒤로 ‘헤어지자’를 남발하지 않게 되어서 인지.
ISFJ가 나온 남자친구는 XNFP인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면 늘 ‘역시 N의 상상력이란.’하며 감탄을 해주었다. 앞의 X는 상황에 따라 E가 나오기도, I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묻는다면 상세한 지식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주길 바란다.
가끔은 남자친구의 이러한 감탄에 호응해주고자 없던 상상도 지어내서 말한 적도 더러 있었는데 사실 이건 비밀이다.
“보통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잖아. 천사나 악마가 노파의 탈을 쓰고 인간을 테스트해본 다음에 테스트에 통과하면 죽이거나 상을 주거나, 그러잖아.
그 할머니가 사실 천사인거지.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받아주는지, 내가 어디까지 정을 베푸는지 테스트 하고 나중에 천사가 되어서 돌아가면서 나한테 복권 당첨시켜줄지 어떻게 알아.”
“…근데 그건 그냥 상상일 뿐일 것 같아.”
역시 S란!
이번 상상은 남자친구에게 재밌는 스토리를 지어내기 위해 만든 상상이 아니라, 정말 어느 날 또 아무렇지 않게 ‘의자 좀 내어 봐.’라며 꽃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할머니에게 ‘곧 손님이 올 시간이라 안된다.’ 며 내쫓은 뒤에(내쫓았다는 표현은 내가 너무 나쁘게 보이지만 달리 대체할 표현도 없긴 하다.) 한 상상이었다.
이 할머니가 사실은 천사이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때에 ‘늘 귀찮았을 할머니에게도 항상 웃는 얼굴을 의자를 내어주고 가끔 천원씩 꿔주던 그 작은 꽃집 처녀에게 복권 1등 당첨을 상으로 내린다.’ 라고 하며 갈 수도.
그런데 미약하고 한심한 인간인 나는 한 번 꿔드린 그 천원이 아직도 응어리 남아 할머니에게도 8월생 친구에게 한 것과 같은 ‘나 혼자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사실 할머니가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이 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 꽃집에는 시주공양하러 오는 절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처음에는 지나가며 ‘어머 꽃 너무 이쁘다’ 하며 2인 1조로 들어와서는 결국 유월절과 토요 예배의 의미를 전도하고 가는 전도사들도 있었다.
나는 무교이고,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 그 중에서도 사이비를 너무나도 싫어하는데 – 아, 혹시 읽고 있는 독자가 기독교라면 오해 말기를. 나의 부모님은 한양대학교 찬송가 동아리에서 사랑을 싹 틔웠고, 내 이름도 기독교 ‘반석’에서 가져와 두터울 ‘후’, 옥돌 ‘민’으로 지어졌다고 했으니 내가 모든 기독교인을 척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이렇게 전도사들이 와서 5분, 10분씩 내게 어떻게든 신의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면 나는 습관성 웃음을 얼굴 가득히 띄운 채, 거절하지 못 하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곤 하였고, 이런 일들이 나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확신하는데, 이런 순간 만큼은 내 MBTI 앞부분은 I 였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느 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왔다.’며 바쁜 티를 팍팍 내며 꽃 정리를 하고 있는 내게 꾸역꾸역 2인 1조의 아주머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익숙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꽃집 아가씨 나왔어~? 의자 좀 내어줘 봐.”
이미 알다시피 내 꽃집은 3평이고, 이 꽃집의 주인인 꽃들이 한 자리 차지하고 남은 공간에 성인 여성 3명이 들어와 있다면, 입구가 얼마나 좁았겠는가.
내가 내 꽃집에서 설교를 듣다 못해 뛰어 나갈거라고 의심하는 건지 꼭 2인 1조의 전도사 중, 한 명은 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고, 한 명만 들어와서 열심히 홍보 전단지를 보여주며 설명을 했는데, 이 때도 입구를 막고 서 있는 전도사 뒤에서 할머니가 외친 것이다.
평소에는 노이로제 걸릴 것 같던 이 목소리가 이 날 따라 어찌나 반갑던지.
“어머, 꽃집 아가씨 있어요!”
처음엔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리치는 노인에 대한 반감으로 표정을 굳혔던 입구를 막은 불청객이 ‘아차, 나 전도사지.’라고 생각을 고쳐 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온화하게 풀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나도 알어.”
늘 웃으면서 가끔은 성희롱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게 해주던 할머니가 처음 듣는 퉁명스런 말투로 대꾸했다.
최근에는 귀찮기도 하고 천 원의 응어리 때문에 할머니에게 소홀하게 대했는데, 그런데도 나를 이 궁지에서 구해주러 왔다니. 과장을 보태어서 눈물까지 날 뻔 했다니까.
“어머 이 꽃집 자주 오세요~?”
됐다. 타겟은 할머니로 바뀌었다. 나는 ‘당신들이 그렇게 전하고 싶은 신이 바로 저기에 서 계세요!’라고 소리칠 뻔 했다.
“그럼 자주 오지. 이 집 아가씨 이쁘잖여~ 씩씩허고.”
“어머 맞아요 할머니. 저희도 너무 이쁘셔서 한창 너무 이쁘다고 말하는 중이었어요~”
거짓말. 이쁘다는 건 ‘하나님’이었겠지.
할머니는 입구의 전도사를 밀어내고, 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서 ‘의자 있어?’라는 대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게도. 만약 할머니가 진짜 신이었다면, 나의 죄를 고하나니, 나는 그 때 정말 바빴다!
의자가 있기는, 지금 내 지친 몸 앉을 곳도 없이 꽃 컨디셔닝 중이구만.
그래서 나는 내 구세주에게, 사실은 입구를 막고 서 있고, 바쁜 내 눈을 맞추려 애쓰는 이 전도사들에게 들으란 듯이
“할머니! 조금 이따가! 지금 너~무 바빠요!”
아차, 하고 바쁘신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전도사들이 물러날 줄 알았는데, 웬 걸. 할머니만 침울한 표정으로 ‘으응 바쁘구나 가야지 뭐’ 하고 돌아섰다.
돌아와요 할머니! 아니 하나님!
내 앞을 지키고 섰던 전도사는
“어머 정말 얼굴도 이쁘시고 마음도 너무 이쁘시네요. 보통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대화 잘 못하는데, 할머니랑.”
하며 아까 미처 다 끝내지 못한 할머니, 아니 하나님 얘기를 이어가려고 운을 띄웠다.
이제 그렇게 ‘마음도 이쁘신 분이 하나님께 성의를 표하면 얼마나 큰 복을 받으실까요?’라고 이어가겠지.
“아 원래 종종 오셔서 앉았다 가시는데 오늘 제가 너무 바빠서요.”
전도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독학으로 하라 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상대의 의중을 애써 무시하는 방법을 배워오는 게 아닐까.
“어머 다정하셔라. 그래서 저희는요.”
“아 근데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진짜 오늘은 너무 바쁘거든요. 다음에.”
할머니가 나를 각성시켰다. 전도사들은 홍보지를 두고 갈 테니 꼭 읽어보라 하며 돌아갔다.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는 이 전에 쉬다 갈 공간을 내어주고 돈도 꿔준 내게 보답을 하기 위해 온 신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