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이후북스, 지구불시착, 북극서점,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엄마, 여기는 왜 연산동이에요?”
“지금은 하나도 없지만, 옛날엔 연꽃이 많은 동네였대. 그래서 연(蓮), 금련산이 저쪽에 있어서 산(山), 연산동. 연산초 옆 도로 있는 데에는 하천도 흐르고 있었는데, 몰랐제?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 지어지고, 하천은 콘크리트로 덮어갖고 도로 만들고 복개천이 됐지. 아마 도로 밑에서 흐르고 있을 거야.”
“우아-”
꼬마는 큰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엉덩이로 누르고 있는 이 땅의 역사에 대해 가만히 들었다. 신기하네. 눈을 살포시 감는다. 머릿속으로 그 옛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연꽃이 가득한 연산동, 하천이 흐르던 연산동. 분홍 연꽃과 초록색 둥근 연잎, 연꽃이 숨 쉬고 있던 진흙, 그리고 하천이 조르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상상을 마치고 눈을 뜨니 매미 소리와 선풍기 소리만이 꼬마의 귀에 들려 온다. 아이고- 덥다- 엄마는 발라당 누워버렸다. 꼬마도 엄마 옆에 발라당 누워 여름의 열기를 느낀다. 엄마가 집에 있으니 너무 좋다. 꼬마의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다. 꼬마가 학교에 가는 것만큼 엄마도 학교에 간다. 그래서 둘은 한낮에 함께 있는 시간이 드물었다. 오늘은 어쩐지 엄마가 쉬는 날이다. 엄마도 쉬는 날에는 마냥 늘어지고만 싶은 건지, 아니면 이 여름이 너무 더운 건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고 있다.
“맞다! 나 준비물 사야 해요!”
꼬마는 벌떡 일어나 앉아 엄마를 흔들었다. 잠이 들던 엄마는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며 말한다.
“얼마 필요해? 돈 줄 테니 갔다 와볼래?”
가방을 뒤적여 지갑 속에서 오천 원을 꺼낸다. 더 작은 돈은 없다며, 오천 원 주머니에 잘 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 말한다.
“차 잘 보고!”
네에-! 꼬마는 초등학교 1학년의 준비물을 살 생각에 신났다. 대문이 쾅 하고 닫힌다.
오천 원은 주머니에 꼭꼭 눌러 넣었다. 신나, 신나. 폴짝폴짝 뛰며 5분 거리의 왕자문구로 향한다. 뜨거운 여름의 햇살은 그에겐 그저 스포트라이트다.
주택 옆 주차된 차들을 지나, 맛있는 아침햇살을 파는 백야 슈퍼를 지나, 신호등을 조심조심 건너, 왕자문구로!
딸랑- 어서 오세요-
무사히 왕자문구에 도착한 꼬마는 준비물을 고른다. 천원도 넘지 않는 준비물을 산다. 어라, 그런데 주머니에 잘 넣어온 오천 원이.. 없다! 꼬마는 이쪽 주머니가 아닌가 하며 앞쪽 양쪽 주머니와 뒤쪽 양쪽 주머니에 모두 손을 넣어본다. 하지만 나오는 건 애꿎은 먼지와 주머니 천밖에 없다!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하고, 꼬마는 중얼거린다. 이상하네, 분명히 오천 원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는데. 이상하네, 돈이 어디로 갔지, 잃어버렸나…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눈물이 삐질삐질 눈앞을 가린다. 우앵...흑, 흑. 꼬마가 꺼낼 돈을 기다리던 왕자 문구 아주머니는 돈은 주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꼬마를 보고 당황한다.
“어머, 야야, 괜찮나?”
“흑, 제가요, 오천 원이나 받았는데요, 분명히 주머니에 넣었는데요, 없어졌어요...우앵-”
아주머니는 꼬마를 토닥이며 물건은 외상으로 해줄 테니 괜찮다며 집에 가보라 하신다. 꼬마의 할머니와 엄마 얼굴을 이미 다 아는 왕자 문구 사장님의 배려였다.
꼬마는 눈물을 닦고 감사합니다, 하고 나와서는 준비물을 꼭 쥔 채 바닥을 보며 걷기 시작한다. 신호등을 조심조심 건너고, 바닥을 살펴보고, 맛있는 아침햇살을 파는 백야 슈퍼 앞을 살펴보고, 슈퍼 앞 우체통도 한 번 보고. 골목길로 바람이 숨겼나, 자동차 밑에 숨었나, 고양이가 물어갔나. 없다, 없다. 꼬마는 발을 동동댄다.
띵동- 엄마가 잠들어있는 할머니 집의 벨을 눌렀다. 동동거리다 보니 삑- 문이 열린다. 작은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후다닥 들어간다. 엄마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훌쩍거리는 꼬마를 마주한다.
“왜 울어?”
삐질삐질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돈이 없어졌어요, 사라졌어요. 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엄마는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준다. 꼬마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괜찮다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토닥이는 손길을 느낀다.
울음을 그친 꼬마는 엄마와 손을 잡고 나왔다. 쨍쨍 내리꽂는 햇빛 속을 함께 걸어간다. 왕자문구 외상을 갚으러 가는 길에도 여전히 꼬마는 바닥을 살핀다. 정말 어디로 가버린 거지, 돈이 도망가버렸어. 다음엔 손에 꼭 쥐고, 꼭꼭 쥐고 가야지.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