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이후북스, 지구불시착, 북극서점,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 그 애에게선 항상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옆을 슥 스쳐 지나가도 그 향이 났다. 나는 그 애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보충 수업에 같이 가고,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치고, 키득거리고, 서로의 노트에 낙서하고, 그러다 수업 시간에 같이 졸고. 그게 다였다. 재미있고 즐거운 게 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꾸만 그 애가 떠오르고, 다른 여자애와 장난치는 걸 보면 질투가 났다. 나랑만 놀았으면, 나랑만 친했으면 좋겠는데. 흥, 그래도 이 마음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애들끼리 친해져도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뭘.
점심시간이었다. 친구와 복도를 산책하고 있었다. 급식 맛있었다, 배부르다, 화장실 가고 싶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그러다 창문 밖 운동장을 보았다. 그 애가 보였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 애가, 웃으며 뛰어다니는 그 애가 보였다.
귀여워...
헙, 작게 새어 나온 내 말에, 작고도 확실하게 새어 나온 내 마음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안 좋아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자꾸만 고개를 휘저었다. 쟤는 키도 안 크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완전 북실북실 곱슬머리에, 멋있지도 않고, 귀엽기만 하고, 웃는 건 예쁜데다, 땀 냄새도 좋은 향이 나고, 나한테 잘해주고, 착한데... 그래.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건지 자꾸만 툭툭 건드렸다. 일부러 다른 여자애들이랑 더 친하게 논다. 툭. 내 이름을 부르며 주위를 맴돌며 장난친다. 툭. 옆에 기대거나 내 팔을, 내 손을 건드린다. 툭. 자꾸만 툭툭 건드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째려보며 웃는다.
그 애의 친구들도 내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았다. 복도를 가다 걔들을 마주치면 친구들은 그 애를 쿡쿡 찔러댔다. 무어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킥킥 웃어대기도 했다. 나는 부러 모르는 척하며 마음을 꼭꼭 숨겨 관심 없는 척했다. 그런데 쟤는 진심이 무얼까.
내가 니를 좋아하는 거 니는 아나, 니는 내 안 좋아하나,
어느 날 밤, 한참 그 애와 톡을 하고 있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우린 같은 속도의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불이 돌돌 말렸다. 작고 네모난 화면을 바라보는 내 얼굴은 미소가 가득하다.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나 사실 좋아하는 애 있다]
갑자기 그 애가 말했다. 세상에. 뭘까. 설마, 설마. 나는 관심 없는 척, 설레지 않은 척 그 애에게 물었다.
[누군데]
[성은 ○]
[? 너무 많은데]
[이름에 ◇들어가]
뭐야. 그 애가 말한 ○이라는 성을 가진데다 이름에 ◇이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 둘. 전교생에 나와, 어떤 여자애 한 명뿐이었다. 설마, 설마, 설마!
[어? 아- 누군지 알겠다]
나는 슬쩍 알겠다며 아는 척 떠보았다. 손톱은 꽉 문 채로. 그 애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
좋아하는 여자애의 이름을. 내가 아닌 이름을.
순간. 생각이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설마.
아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간을 재생시켜 얼른 톡을 보냈다. 애써 괜찮은 척 톡을 보냈다. 하하, 그치, 그 애가 예쁘긴 하지, 좋아할 만하지…. 그러고는 자야겠다며 말을 얼버무린 채 이불 속으로 깊숙이 숨어 버렸다.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항상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같은 속도의 시간을 보내며 그 애를 참 많이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온도와 그 애가 가진 온도는 달랐다.
나쁜 놈. 좋은 향만 남기고, 내 첫사랑의 자리를 꿰찬 후, 떠나버렸다. 은은한 붉은빛 향과, 갈 곳 잃은 그리고 식어버린 내 마음만 남았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