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기억은 영원히 남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세세한 부분은 사라지고 흐릿해진다. 혹은 일어났던 일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지고는 한다. 이러한 성질 덕에 우리는 힘든 일을 조금씩 잊으며 살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날들도 있다.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면 그 순간에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도 부족해서, 순간에 담아내지 못한 소중한 장면도 있어서, 기억을 끄집어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언젠가 잊힐 장면을 다시 꺼내 기록으로 남긴다. 기록은 기억의 재활용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해의 생일을 잘 기억해내고 싶다. 소중하고 감사했던 나의 스물네 살 생일을 기억하고 싶다. 머릿속에서 짧은 영상으로 재생되는 장면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기억해내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기억하기 위해 기록의 힘을 빌려본다.
생일은 언제나 기쁘고도 슬픈 날이다. 성대하고 화려한 생일 파티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소했던 내 생일에 대해 슬퍼한다. 평소보다 훨씬 특별한 날이어야 할 것 같은데 똑같은 나날인 것 같아 슬퍼한다. 분명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슬퍼한다. 더, 더 특별해야 할 것 같고 더, 더 기뻐야 할 것 같다. 종일 기뻐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안다. 행복한 순간이 24시간 지속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다. 알지만 괜히 슬퍼진다.
올해는 좀 달랐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에 사람이 찾아들어 왔다. 3년 만의 복학에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
지난 2월 함께 캄보디아로 봉사를 떠났던 친구들이 있다. 타지에서 3주간의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서일까 우리는 꽤 돈독해졌다. 관계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계도 만들었다. 캄보디아에서 한 친구의 생일을 챙긴 후, 한국에 돌아가서도 우리 서로 생일에 모여 축하해주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남이 내 생일 전 주 금요일에 잡혔다. 하지만 다들 생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혹시 친구들이 생일을 까먹을 가능성과 혹시 나 몰래 준비했을 가능성을 생각하며 설레발을 쳤더랬다.
다 같이 만났을 때, 늦게 오는 친구가 있었다. 그저 늦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생일 케이크를 사기 위해 늦은 거였다. 내가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부시럭대는 줄도 몰랐다가 깜짝 생일 케이크를 내밀어 감동시켰다. 롤링페이퍼에 작은 현수막 배너까지 정성 가득, 감동 가득인 선물이었다. 한 친구는 그림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생일 당일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12시가 되기 10분 전에 제일 먼저 축하해주겠다던 친구가 있었고, 한 페이지쯤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준 언니도 있었다. 그 언니의 편지는 특히나 감동이었는데, 내가 했던(사실은 했는지도 몰랐던) 어떤 말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생일날 보내.
나 생일에 놀아줘. 이 말에 응해준 친구들이 있었다. 의외의 만남에서 이어져 이제는 서로가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게 된 친구들이다. 취향도 비슷하고, 깊은 내면의 생각을 공유하거나 감성도 비슷하다. 그들과 창경궁 앞에서 만났다. 선물을 잊고 가져오지 않아 샀다며 작은 케이크를 내미는 친구, 선물이 뭔지 맞춰보라며 식물 하나와 작은 박스 하나를 슥 내미는 친구. 또 한참 웃고 대화하고, 따땃한 솥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생일날 뭐하냐며 물어오던 친구도 있었다. 학교에서 사귀게 된 과 후배들이었다. 복학 후 빠른 속도로 친해져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었다. 먼저 물어 준 친구들이 고마워 술 먹자며 이 술찌가 외쳤고, 그들은 내게 깜짝 축하를 해주었다. 몰래 케이크를 준비해 불을 붙이고, 기타로 생일 노래를 불러주고, 누가 썼는지 비밀인 롤링 페이퍼를 내밀고. 귀엽고 웃기고 감동적인 파티였다. 그리고 나는 신난 마음에 술을 꿀떡꿀떡 먹어댔다.
다음 날 아침, 알코올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나에게 언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귀여운 양말 세 켤레였다. ‘생일 선물이다. 어제는 너무 늦게 들어와서 못 줬다.’ 경상도 사람의 특유한 츤데레를 뿜뿜하며 챙겨주는 언니였다. 괜히 감동 먹은 나는 이불 속에 폭 숨은 채 출근하는 언니 뒤를 향해 고맙다아-하고 외쳐댔다.
갑자기 시간 되냐고 묻던 언니가 있었다. 무언가를 꼭 주고 싶다고 만나자고 하던 언니가 있었다. 생일에 맞춰 물어봤기에 생일 선물을 주겠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만나 한식 한 상을 먹었다. 그리고 언니가 선물을 건넸다. 향수였다. 향수를 가져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을 선물해준 언니가 고마웠다. 머리 위로 한 번 뿌리니 달콤하고도 시원한 비누 향이 퍼진다. 왠지 으른-이 된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음력 생일이 되자 가족들이 축하해주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축하 전화, 엄마의 축하 전화, 아빠의 축하 메시지. 다들 미역국 끓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어디선가 사 먹으라고 난리였다. 엄마는 슬쩍 작은 스탠드 하나를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생일 선물을 잊고 주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다. 생일날 만났던 그 친구다. 받고 나면 웃길 거라며 기대하는 눈빛 앞에서 선물을 뜯었다. 내가 좋아하는 지브리 손수건과 컵이었다. 그리고 곧 터진 웃음. 내 생일 이전에 생일이었던 친구에게 내가 주었던 선물 종류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손수건과 컵. 분명 서로 어떤 걸 선물할지 전혀 모르고 준비했는데,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니! 우리는 또 깔깔 웃었다.
길었던 나의 생일이 드디어 끝났다. 많은 축하를 받았다. 내게 진심의 축하를 건네준 사람들 하나하나 안아주고 싶다. 행복한 생일을 선물해주어 고맙다고. 내 생일은 이미 화려했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된 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갈피를 꽂아둔 스물네 살의 생일을 종종 펼쳐 볼 것이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