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투티 Jul 07. 2023

좋은 대학 나오면 돼

묻혀버린 고등학생의 의견




기억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 되돌아간다. 반에같이 다니던 친구와 매번 하는 얘기는 ‘헬조선 탈출한다’였다. 매일 매일 학교에 나와서 관심도 없는 주제의 수업들을 들어야 했다. 선생님들은 엄했고 모든 것이 규칙 속에 있었다. 사실 규칙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나는 말을 잘 들어서 매번 모범생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사람이었는데, 한 이유는 지킬 만 하니까 지킨 것이고 둘째로는 갈등을 만들기 싫어해서 그런 것이었다. 규칙을 싫어하는 건 오히려 그 친구였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 없이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 학생들이 대학을 가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 그 분위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에 자는 시간 이외에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 모두에 대해서 비판했다.




선생님들은 “하고 싶은 건 대학교 가서 해.” 라며 학생들을 달랬다. 진짜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누르고 불합리에 침묵하는 법부터 배웠다. 똑똑한 학생들은 많았다. 선생님들 앞에서 환경 문제나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논할 줄 알았으나 왜 대학교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좋은 대학에 가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믿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은 흥미로운 일화가 여기에 있다. 공부를 참 잘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떤 발표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몇 마디 불평하고 말 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혹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 친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발표를 듣던 선생님께서는 공감이 되셨는지, 역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원래 선생님은 이렇게 개인적인 의견을 내면 안 되지만, 애들아, 그런데 이게 맞지. 이게 맞지 않니? 이게 너희들이 좋은 대학 가려고 공부하는 동기가 될 수 있어.” 선생님은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뒷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보던 나는 매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반박할 말이 당장에 떠오르지 않았다. 5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나는 걸 보면 상당히 인상적인 기억이다. 지금에서야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본다.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면 과연 이 분위기와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할까? 아니지. 이 현상을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간 사람들이 더 대우받는 사회를 왜 바꾸려 할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보수가 되기 마련이다. 경쟁 시스템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 어떤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 갈등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학교는 사회적 문제를 바꾸기 위한 목소리는 누구든지, 몇 살이든지 낼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히잡을 입고 벗을 자유를 외치며 시위한 이란의 소녀들, 노르웨이의 환경 운동가 툰베리 모두 지금이 아니면 언제, 를 외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홀로 외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 비밀은 연대에 있다. 학교는 협동하는 법은 배우게 하면서 연대하는 법은 왜 알려주지 않나? 오히려 우리는 상대평가라는 교묘한 제도 때문에 급우를 견제하고 급우와 경쟁한다. 상대평가 제도가 도입된 시스템을 대놓고 시행하고 있으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표어로 내거는 것은 모순이다. 모순을 만들고 이어 나가는 것은 누구인가? 이 모순으로 이익을 얻는 건 누구인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다.




십대들은 학교에서 목표 없이 달리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운다. 자신의 목표가 없으면 타인의 목표을 자신의 목표로 내재화한다. 그거라도 없으면 달릴 이유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난 이후에도 자꾸 달려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나 또한 그런 십대였다.




자, 그러면 누가 죄인인가? 뮤지컬 ‘영웅’의 노래처럼 말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렵다. 좋은 대학에 가라고 다그친 선생님이 잘못일까?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교육청이 잘못일까? 좋은 대학교 간 사람들이 문제일까? 흑백논리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모두가 조금씩 인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학벌주의 사회가 된 이유는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유지하여 계속 이익을 얻으려 한다! 라는 음모론적, 반사회적인 주장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좋은 대학에는 일정 과정을 참을성 있게 이수하고 사회에 너무 반항적이지 않은 사람이 모인다. 그런 사람들은 배려할 줄 알고 충동적이지 않다. 좋은 대학에는 지능이 어느 정도 이상인 사람이 모인다. 이렇게 좋은 대학에 오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평균적인 모습 때문에 학벌주의가 되었다. 사회에 너무 반항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일하기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회사는 이익을 내고 싶고, 이익을 내려면 조직 안의 구성원이 자신의 일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학점을 낸 인물은 매우 성실한 인물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회사는 좋은 대학, 좋은 학점의 인물을 사원으로 뽑고 싶어한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그 밖에 공부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꽤나 공평한 평가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이다.




성실은 미덕이지만, 무조건적인 성실은 미덕일까? 그것이 미덕이라면 누구를 위한 미덕일까?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면 한 번쯤은 고민해 봐야 한다. 나는 20대인데, 대학교에 들어간 내 또래들 중 얼마나 많은 비율이 과연 청소년기, 특히 고등학생 때 자신이 뭐를 좋아하는지 안 채로 대학교를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원하는 진로를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덥석 들어갔는지 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