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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투티 Jul 13. 2023

성인과 어른의 차이

성숙의 기로





이전 글에서는 조금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글을 작가 심사 첫 번째 글로 해서 통과한 것이었다. 약간 모험이었는데 브런치가 통과시켜 주다니, 다시 봤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된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의 시스템에서 오는 불만 때문도 있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맹목적인 학벌을 향한 압박에 나는 길을 잃었다. 사실 그 사람들도 다 같이 길을 잃은 상태라서, 목소리 큰 사람의 목표를 함께 쫓았던 건 아닐런지.




반 안에서 학우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들렸다. 지금 십대들은 본인이 사는 국가를 욕하기 위한 어떤 용어를 쓰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지금 20대는 그 용어를 다 알 것이다. 그렇게 헬조선 탈출을 결심하고, 고3때는 보이기로는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건 재수할 생각은 들지 않도록 – 이라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열심히 힌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에 대해서 정말 몰랐는데, 이거 하나만은 알았다. 재수를 하게 되면 나는 고민과 스트레스로 인해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대학교 4년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다. 4년 동안 공부할 것이라면 당연히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골라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십대의 머리로도 그걸 알았다. 그런데 나는 공부하고 싶은 분야라는 게 없었다. 보통 그러면 좋아하는 걸 공부해! 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좋아하는 게 나는 그림 그리기, 판타지 책 읽기 정도였다. 그림 그리기를 살리자니, 입시미술은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 하겠다고 밀어붙이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릴 시간이 없었다. 중학생 때 학교 학원 학교 학원. 엄마는 내가 공부를 시켜야 하는 애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판타지 책 읽기는 취미지 도무지 공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고등학교 내내, 나는 자기가 뭘 좋아하며 공부하고 싶은 것이 확실한 애들보다 모르는 애들을 더 많이 목격했었다. 보다시파 나도 후자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학교에 가려면 입학하고 싶은 학과를 정해야 했다. 좋아하는 건 뭔지 모르겠어서, 차라리 점수라도 잘 받게 잘하는 걸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는 과목 중에서 그나마 국어, 영어, 일본어 등의 언어 과목에 다른 과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마침 외국어학과는 많은 대학교에 있으니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그래서 수시 여섯 학교와 정시 세 학교를 넣을 때 대부분 외국어과를 썼다. 기억이 맞다면 그 중 중국어과, 일본어과, 프랑스어과, 체코슬로바키아어가 있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체코슬로바키아어과(이하 체코어과)에 들어왔다.




그렇게 헬조선 탈출의 꿈은 점점 가까워지는 듯 보였다. 꼭 해외로 나가야겠다기보다는, 해외에서의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뉴스로도 유럽에서의 인종차별 등은 접하기에 해외가 꼭 좋은 게 아니란 것은 알았다. 그렇게 체코어과에 들어와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체코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객관적인 지표들을 조금 나열해 보겠다. 체코의 인구 수는 1000만 명, 영토는 남한보다 조금 작으며 내륙국가다. 체코어를 사용하고 반 이상이 무교다.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전통적인 민족인 슬라브 민족은 큰 키에 밝은 머리, 색깔 있는 눈동자 등등이 특징이다. 체코는 한 때 공산정권이 집권했던 국가였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예술가들이 좀 있는데, 죠스 bgm 작곡가인 안토닌 드보르작, 아르 누보 화풍의 화가 알폰스 무하, 영화 아마데우스를 찍은 영화감독 밀로쉬 포르만(영어식으로는 밀로스 포먼) 등이 있다. 유럽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유럽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기념비적인 일은 하지 않은 조용한 나라다.




대학교 1학년과 2학년 때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젊은 때는 이것저것 경험 쌓고 콘서트도 다니고 페스티벌도 가고 쇼핑도 하고 동아리도 하는 거야! 사람들이 말했다. 그런데 나는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갑자기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니라, 그냥 중고등학생 때도 그런 거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과 사교생활을 하는 것에 관심이 적었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기가 빨리는 게 싫은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력한 자신이 싫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어딘가에 기대야만 하는 자신이 싫었다. 우리 집은 엄마가 집안일을 다 했기 때문에 나는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방청소도 내가 직접 하지 않고 나는 학교와 학원에만 다녔다.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라는 직함을 달았지만, 성인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였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설거지랑 청소기는 돌릴 줄 안다. 그런데 세탁기 돌리기, 내가 먹을 밥 한 끼 할 줄은 모른다. 과일도 깎을 줄 모른다.




스무 살이 넘어 기계적으로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은 되지 못한 채였다. 무엇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성인. 기껏해야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이 허락되는 정도. 그것은 자유라고 부를 수 없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자유로운 게 아니었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몸도 비실비실, 공부한다고 매일 앉아 있느라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것도 옮길 수 없다. 나의 무능력이 싫었다. “원래 고등학생은 그냥 공부하는 거야.” 고등학생 때 수백 번은 들은 말이다. 나는 그냥이라는 말을 들으면 냉소적이 된다. 그냥이 어딨어.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나의 십대 때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가. 아니, 애초에 다 쥐고 살 수 없었던 건가. 현실을 마주하기가 고통스럽고 어느 한구석에서는 원망스러움이 올라왔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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