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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투티 Nov 02. 2023

좋아하는 걸 좋아하면 안 될까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





이야기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유치원 시절의 일이다. 그림이 많은 한글 배우기 학습지에 나오는 동물과 사물의 그림을 가위로 오려서 빈 공책에 붙였다. 랑이를 붙이고 입에 구멍을 냈다. 뒷페이지에는 사자를 붙였다. 호랑이의 입과 사자의 입이 연결되게 붙였다. 사자의 옆페이지에는 옷장을 붙이고 옷장문만 열리게 가위질을 했다. 조그마한 사람도 오려서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었더니 사자의 입으로 나온다. 사람은 사자를 피해 옷장으로 도망친다. 그런 식으로 다른 그림들을 찾아서 공책에 붙인다. 옷장 문을 열면 어디로 나올까? 현관문을 찾는다. 옷장이 붙어있는 페이지의 뒷페이지에 현관문을 붙인다. 옷장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다음 페이지에는 현관문으로 나온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람은 계속 모험할 수 있다. 어렸을 적 내가 놀았던 방식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꽤 창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냉소적이고 우울한 사람이 되었더라?




비소설보다 소설을 좋아했다. 소설 중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림 메르헨이라고, 독일의 그림 형제가 썼다는 글밥 많은 잔혹 동화 모음집에 푹 빠졌다. 재밌어서 읽고 또 읽었다. 300장은 되는 거였는데 무거워서 낑낑거리면서도 학교에 가져가서 읽었다. 그 이후로수많은 책을 읽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 타라 덩컨, 율리시스 무어, 오즈의 마법사 뒷이야기, 나니아 연대기. 신화도 광적으로 좋아했다. 한국 신화부터 시작해서 중국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아라비안 나이트, 바이킹 신화, 아서 왕 이야기, 아일랜드 신화, 아스텍, 잉카 문명에 대한 이야기들. 




중학생이 되고 수많은 웹툰은 내 학창시절을 채웠다. 왜 내가 즐기는 책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현실 이외의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고 볼 수밖에. 외를 해 주시는 어떤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런 판타지 소설을 속독해서 읽어버릇 하니까 지문을 대충 읽고 문제를 틀리는 거야. 판타지 소설은 당분간 보지 마. 안다. 그 분은 내 성적을 올리는 것이 일이니 성적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를 없애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런 말을 하신 것이다. 그 분에게 잘못은 없다.




나는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도피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을 탓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판타지라는 장르가 예전부터 계속, 지속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판타지 장르를 좋아한다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어릴 적부터 추리 장르, 로맨스 장르, 비소설을 좋아하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나는 비유와 상징을 사랑했다. 판타지 장르의 세계관은 현실을 반영하나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한 비유와 상징의 세계다. 그 안의 인물들도 현실과 같은 희노애락을 느끼기 때문에 그 이야기로부터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했다. 애니메이션 속 많은 주인공들이 죽음에 가까운 시련을 딛고 일어선다. 스트레스 속에서도 그런 주인공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저렇게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오타쿠, 음침하다 라는 프레임이 무서워서 본다는 얘기도 잘 안 하고 다녔다. 상처받기 싫었던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래 나를 본 사람한테만 말했다. 이런 거 좋아하고 재밌어 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이런 거 본다고 나를 멀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멀리할 사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 어떤 프레임으로 규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해도, 나는 그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상품을 사는 것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오프모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허구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무시하고 싶어도 무의식 속에서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순적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이 허구임을 계속 인식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모순적인 나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것이 사실은 무엇이든 양면성을 볼 수 있는 나의 성격적 특징이며 장점이라고 정의하기까지 내면의 갈등이 길었다. 주변 사람의 시선에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예전에는 나는 왜 예민할까 하며 또 나를 깎아내렸다. 너 예민한 거야. 라고 들으면 '나 정말 예민한가 봐. 좀 고치고 싶은데 난 의지가 없나?' 하며 또 자신을 탓했다. 그 예민함이 갈고 닦으면 진짜 강점이며 살아가기 위한 무기가 되는 줄도 모르고 그런 특징을 너무 미워했다. 청소년기에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는데, 그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서였던 것 같다.




다시 판타지 이야기로 돌아와서, 판타지 장르의 작품이라고 호불호 없이 무조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판타지 장르 안에서도 아주 까탈스럽게 서사를 고르고 골라 마침내 좋아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의 판타지 소설은 정해져 있다. 그만큼 수도 적으며, 그래서 찾기 힘들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게 어느 날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써 보는 건 어떨까, 라는 퍼뜩 떠오른 문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프라하에서 반년을 보낼 때 스물한 살, 프라하에서 반년 [2] 늘어난 내 시간을 어떻게 소비할까 생각하다가, 짧은 소설들을 써 보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나를 무리하게 하려는 오랜 습관 - 목표 없이 달리는 습관 체코는 무슨 언어를 써? [1] - 과 싸우며 그렇게 글을 썼다. 그래서 앞으로의 이야기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웠던 아이가 여러 단체에 속하면서 마모되고 사회의 평균적인 규격이라는 것을 알면서 움츠렸다가, 스스로와 화해하고 나아가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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