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창작자 [2]

by 후투티




지지난 게시글 이 시대의 창작자 [1]에 이어 이번에는 창작자들의 주체성에 대해 조금 더 심층적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조금 독특한 관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독특하지 않고 다들 아는 얘기라면 굳이 글로 쓸 이유도 없다!) 이번 게시글의 결론은 이것이다.


“후회를 줄인 삶을 위해서는 주체성이 필요하고, 창작은 주체성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니 창작을 망설인다면 시도해 보자.”


사실 <이 시대의 창작자 [1]>와 결론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냥 ‘창작 권장글’을 또 쓴 것과 다름없지 않나 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이번 글은 맥락이 좀 다르다. 어차피 브런치라는 게 보고서 쓰는 곳도 아니고, 내가 자유롭게 글 올리는 곳이고, 솔직히 창작 권장 두 번 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 매거진에서 다루는 주제도 계속 창작이기 때문에 안 올릴 이유도 없겠다. 무엇보다도 이거 쓰는 데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썼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것일까? 결국 과거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창작하는 일은 소득을 만들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으니 창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계속 죽이고 살았던 사람 중 하나다. 지금도 물론 창작으로 소득을 얻고 있지는 않지만, 창작을 시작하고서부터는 스트레스가 줄고 삶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AI가 만연한 이 시대에, 창작자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끼고, 그래서 창작하기가 망설여진다면, 이 글을 읽으며 인사이트를 얻어가길 바란다.


미술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놀라웠던 점이 있다. 작가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관이 드러나는 순간은 다양했다. 어떤 작가는 인터뷰 중에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사랑이 부족하기에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계속 만들 거다’ 라고 말한다던가, ‘이제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지만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릴 것이다’라고 말한다던가, 혹은 말이 아니라 패션으로 보여주었다. 초록색 바지와 웃옷을 입고, 초록색 안경을 쓰고, 초록색 가방을 멘 그는 이것이 자신이라 말하듯, 초면인 나에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뽐냈다. 아무 날 아닌데도 그저 만남을 축하하기 위해 꽃 한송이를 건넸다. 어떤 작가는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잡지에 실릴 자신의 원고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이제 보니 그들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기를 선택했다. 오랜 시간의 경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되어 행하는 ‘주체성’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자유 의지를 행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방종이 아니라 자아탐구,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성찰한 끝에 보이는 태도다.


물론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주관을 가진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그저 내 직관대로 말하자면, 작가인 사람들이 대체로 주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관은 있지만, 창작을 하면서 주관은 예리해지고 그 무엇과도 구분되는 독창성을 갖는다. 남의 것을 베낀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각자만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방식이 바로 그림, 글 같은 것이다.


창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시각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 인식하고, 나와 남이 다름을 인지한다.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 사람이 된다. 같은 꽃을 그리더라도 어떤 작가는 꽃잎의 끝이 뾰족해야 아름답다 생각하고, 어떤 작가는 둥글어야 아름답다 생각한다. 꽃의 줄기를 연두색으로 칠하는 작가가 있고, 진한 초록색으로 칠하는 작가가 있다. 진한 초록색에 약간의 연두색을 점찍듯 더하는 작가도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만의 답을 만드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소설가,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알게 모르게들 말한다. 이 시대에는 창작으로 수입을 만들기 - 다시 말해 돈을 벌기 - 가 어렵다는 것을 알더라도 창작자들은 창작을 지속한다. 그것은 결국 창작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보상이기 때문이리라. 돈, 자원, 보석, 음식 등 물질이 아닌 행위가 보상이 되는 놀라운 현상이다.


얼마 전에 영상 하나를 보았다. AI와의 바둑 승부에서 한판승을 따낸 바둑기사 이세돌을 연예인 홍진경이 인터뷰였다. 이세돌은 자신이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뒤이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수읽기를 해서, 자신이 결정을 해서 탁 내려서 두잖아요. 그게 너무 소중하다라는 게(걸), 그 때는 몰랐어요."


아마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좋다’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바둑판 위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 판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판을 만들어가는 것. 창작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그만의 예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체적 결정과 행복감 사이에는 분명 연결고리가 있다. 그 행복감의 다른 이름은 성취감이다. 설령 그 주체적 결정이 당장 손실을 보는 한 수였다고 해도,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내게 좋은 수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좋은 결정이 무엇인지 인식하며 나 자신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한다. 이 데이터는 인생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에서 내게 맞춤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는 ‘후회를 줄인 삶’으로 이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이자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건 다 좋은데, 고민을 홀로 끌어안고 끙끙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에게 여러 조언을 얻는 것은 좋은 선택에 다가가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결국 결정하는 건 ‘나’이다. 결정의 고삐를 내가 쥐고 있어야 한다. “부모님이, 친구가, SNS가 그래야 한다고 해서요” 라고 변명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시 창작자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국 창작은 주체성을 기르기에 좋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세상에는 온갖 광고가 넘쳐나고 당신의 사고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고 싶어한다. 이것을 사, 이것을 봐, 이것을 선택해. 너 빼고 다들 알고 있어. 너 빼고 다들 구매했어. 당신의 행복에 마음을 쓰는 듯 보이지만 슬프게도 개중에 대부분은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재화와 서비스를 팔아서 생존을 위한 자본을 축적하는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걱정은커녕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그런 사회에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 주체성을 훈련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상대가 나를 목적으로 대하는지, 수단으로 대하는지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AI의 등장으로 명령어만 입력하면 디자인을 대신 해 주고, 글도 대신 써 주는 시대가 왔다. 글 작가는 AI에 대체될 직업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돈을 버는 직업으로서는 대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통계를 내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 AI가 한 권 분량의 글을 써줄 수는 있겠지만, 내가 생각해서 써서 완성해내는 성취감까지 제공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창작을 통한 성취감이란 보상은 내가 느껴야지, AI가 대신 느끼면 무슨 소용인가.


창작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보상이 되고,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을 여러 번 마주하게 하며 작은 성취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 (생각대로 잘 안 되면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것도 창작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니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내 그림, 글 실력, 혹은 그 창작 분야에서 오래 있었던 숙련자들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창작을 포기하지 말자. 무언가 창작하고 싶다면 해보자. 창작하고자 하는 의지는 돈을 벌고 못 벌고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영역에서 비로소 본래 가치를 찾는다. 다시 말해 직업으로서의 창작자는 추후에 생각하고, 정체성으로서의 창작자를 고려해 보자.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나는 창작하고 싶은가? 오랜 시간 마음 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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