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창작자 [1]

by 후투티



화가라고 할까, 작가라고 할까. 내가 미술 잡지사에서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평평한 화지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었으니 화가라고 칭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만날 때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가라 불렀다. 그들은 단지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입체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이미지로는 부족해 글까지 쓰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든간에 ‘만들어내는 사람’을 존중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칭호가 ‘작가’라고 하겠다.


내가 미술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된 이유 2> 미술사 책 속에 소개된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스스로도 무언가 창조하고 싶다는 마음을 대리만족했다. 결국 나도 무언가 창작하면서, 글을 쓰면서 신기하리만치 그 목마름은 줄어들었다. 아마 표현을 계속 해야하는 병 같은 것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들을 좋아했기에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작가와 인터뷰하는 것, 작가가 쓴 글을 받아서 편집하는 것 모두 보람찬 경험이었다. 작가들의 그림과 그의 삶을 써내려간 글을 보면서 즐거워했던 학창시절을 넘어, 작가를 직접 인터뷰하는 기자가 될 줄은, 잡지사에 들어오기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 또한 삶의 놀라움일 것이다.



작가들이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서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로서 만나는 것은 좋다. 어쩌면 그의 가족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 생활을 위해 학비를 댄다던지, 작품 옮기기에 동원된다던지 하는 나름의 희생을 감내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작품활동에 전념하느라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지 못해 외롭게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밖에는 그냥 순수히 인간으로서 성격이 이상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작가로서 있을 때를 좋아한다. 그들이 몰입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막힌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할 때, 자신과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대체로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쓴 원고를 받아서 잡지에 싣기 전에 교정 및 교열하는 작업 또한 했다. 찬찬히 읽다 보면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의견이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나름의 대답을 찾는다. 어딘가의 부품으로서 기능한다기보다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 의지를 행하는 모습은, 그 태도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가들이 작가가 된 건 누군가가 강요해서, 돈을 잘 버니까 부모님이 설득해서 이 일을 하게 된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경우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천 번 흔들렸겠지만 - 내면이든 외부든 어떤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 결국 자신을 표현하는 길을 선택한 것,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타인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착각하기 쉬운 시대에.


작가가 되어야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다 보니 어느새 작가가 되어있는 거다. 그말인 즉슨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누군가가 작가라고 부르는 순간이 오고 스스로 작가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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