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평화 분식
작년 한해 1년 동안 3번의 이사를 했다. 최대 피해자는 막둥이었지만 자식 힘듦을 속으로 삭혀가며 정처 없이 떠도는 부모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래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목포에서 어느새 세 번째 계절인 여름을 맞는다. 이곳에서 얼마나 있게 될까? 강진이 출생지임에도 가난 탓에 인근조차 여행 다녀보지 못한 남편이나 경상도 경기권에서만 산 나나 전라도는 낯선 타지(他地)다. 땅도 낯설고 그 땅에 사는 사람도 설다. 남편과 나는 시간을 내어 목포 땅을 밟는다. 목포의 역사를 살피고 지난 목포의 시간 속에 뼈를 키워온 사람들을 이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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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마다 그 도시를 명명(命名)하는 슬로건이 있다. 목포는 “맛의 도시”다. 항구가 있는 곳이니 각종 수산물들이 넘쳐나고 땅이 붉어 각양 채소와 식물이 건강함을 더한다. 그래서 “맛의 도시”라 일컫는 것일까? 차로 10분 거리마다 큰 시장들이 자리하고 있고 부둣가에는 수산물시장과 건어물 시장이 발달해 있다. 가까운 흑산도에서 잡은 귀한 홍어도 목포항으로 들어와 홍어 골목, 민어 거리도 형성되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 바다가 있으니 해산물이 있고 각종 횟감이 넘쳐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말이다. 참 신기하다. 어패류 이상으로 눈에 띄는 알림판이 있다. “단팥죽”, “팥죽” “콩물”이다. 어느 곳이든 겨울 시즌 메뉴로 판매하는 곳들은 많다.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서부터 메뉴판에 스티커를 붙어 가림을 해둔다. 그런데 목포는 다르다. 아예 가게 이름이 붙은 입간판에서부터 “팥죽”이다. 카페에서 단팥죽을 파는 곳도 많다. 맛의 도시임을 자랑하는 목포. 그 대표 메뉴인 탕탕이에 버금가는 것이 “팥죽”이란 말이냐.
나는 같은 팥이라도 단팥죽은 좋아하지만 팥죽은 싫어한다. 단팥죽이나 팥죽이나 뭐가 다를까 할지 모르지만 내게 그 둘은 전혀 다른 음식이다. 팥죽은 어린 나이에 기억되는 노동이다. 엄마는 동짓날이 가까워오면 윤기 나는 팥은 넓게 넓게 펼쳐놓고 벌레 먹은 것과 실하지 않은 것을 가리는 작업을 며칠을 걸려 했다. 그 작업이 끝나면 하룻밤을 물에 불려 그것을 삶았다. 첫 번째 삶은 물은 먹으면 팥의 사포닌 성분 때문에 설사를 한다고 미련 없이 버렸다. 다시금 맑은 물을 채워 한소끔 끓인 다음 약불로 정성을 들여 몇 시간에 걸쳐 삶았다. 어디 그뿐일까? 팥죽에 들어갈 새알 옹심이를 빚는다. 그곳에 동원되는 것이 나의 작은 손이었다. 처음 몇 번은 재미로 동글 거리며 만지작거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는 아프고 팔도 저려온다. 내가 게으름을 부리면 부릴수록 엄마의 밤은 더욱 깊어 갔을 테지. 그 정성으로 우리는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된다. 악귀를 몰아내고 한 겨울을 탈 없이 보내길 바라는 엄마의 염원이 담긴 “온기.” 하지만 어린 난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지 못했다. 설탕을 듬뿍 넣어 달달하니 간식으로 먹는 단팥죽처럼 먹고 싶지만, 팥죽은 밥 대신이었고 밥에다 설탕을 넣을 수 없다는 것. 또 얼마나 뜨거운지 붉은 바다에 빠진 하얀 눈송이를 집어 입안에 넣으면 시원해지기는커녕 입천장을 데기가 십상이었다. 엄청난 양을 끓여서 둥근 스텐 통에 넣어 몇 날 며칠을 먹게 되는 팥죽은 흐물어져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옹심이처럼 어린 나에게는 곤란한 음식이었던 게다.
하지만 단팥죽은 다르다. 어릴 적 엄마는 “제과점”을 하셨다. 70-80년대의 제과점은 지금처럼 프랜차이즈 빵집처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부유층 사람들이 아니고는 맞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엄마가 경영한 제과점의 겨울 한정메뉴 중 하나가 “단팥죽”이다. 뚜껑이 있는 종지에 꿀에 절인 밤을 하나 통으로 넣고 그 위에 통팥이 살아있는 팥물을 붓는다. 그 위에 고명으로 잣 두어 개와 찹쌀떡을 썰어 띄운다. 팥은 삶을 때부터 설탕을 넣어 팥 한 알 한 알마다 달기가 베어 먹는 입에 즐거움과 행복을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적당히 구워서 얹은 찹쌀떡도 한 입에 먹기에 알맞을뿐더러 마지막 꿀에 절인 밤은 팥물의 온기에 속까지 부드러워져 입안에 넣자마자 녹듯이 스며드는 맛의 화룡정점이다. 단팥죽 덕분에 나는 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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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목포에서 “어머나”를 외쳤던 순간이 국숫집마다 “팥 칼국수”가 있을 때였고 분식점에 팥죽이 있을 때였다. 그것도 테이블마다 노란 설탕이 인색하지 않게 한통씩 올라와있었다. 그뿐이랴 카페에서도 나이 많은 늙은이란 소리 듣지 않고 “단팥죽”을 주문할 수 있다. 그런데 목포는 어떻게 “팥”과 관계 깊은 도시가 된 것일까?
팥죽과 관련된 이야기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냥 후 배가 고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의 이야기다. 그로부터 시작되어 서양에서는 팥죽이 형제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음식이 되었지만, 동양권에서는 악귀를 몰아내는 주술적 성격이 강한 신성한 음식 중 하나다. 우리가 보통 몸이 허해지거나 아프면 죽을 끓여먹는다. 8배의 물에 푹 삶아 정성으로 끓여내는 죽에 주술적 힘을 가진 팥이 더해진 팥죽은 얼마나 효능이 뛰어날까? 그래서 백성들을 사랑한 영조의 마음이 팥죽 한 그릇에 표현된 “조선왕조실록” 기록이 있다.
“나이 60세 이상 되는 백성을 불러오도록 한 다음 노상에서 쌀을 내려주고, 또 선전관에게 명하여 종로거리의 걸인들을 데려오도록 한 다음 팥죽을 나눠주었다. -영조 46년 11월 6일”
비루한 걸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종로거리에 커다란 솥을 걸었다. 장작불을 피우고 검붉은 팥을 쏟아붓는다. 연신 뿜어내는 솥단지의 연기마다 걸인들의 꼴닥거리는 목울대가 겹쳐진다. 영조는 참 자상한 왕이었나 보다. 11월 한기가 시작될 무렵 길거리 생활을 하는 그들을 위해, 시작되는 겨울을 잘 이겨나기를 바라는 국부(國父)의 염원을 담았다. 그리고 펄펄 끓는 솥뚜껑을 열어젖히고 한 국자 푹 떠 그들의 언 손을 녹여줄 팥죽 한 그릇을 돌렸다. 어쩌면 팥죽은 먹거리가 녹녹지 않았던 그 옛날 허기를 매우는 애환을 담은 음식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목포의 팥죽도 힘들고 어려웠던 부두 노동자들의 음식으로 전해진다. 전남 어촌의 작은 부두에 고깃배를 부리고 돌아온 그들에게 먹거리는 잡아 올린 생선뿐이었을 터인데 그들의 비릿하고 냉한 배를 달래줄 음식이 무엇이 있었을까? 그들이 그리워했을 따뜻할 곡기. 팥죽 한 그릇이 여기 있다. 냉함을 다스릴 팥의 온기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새알 옹심이의 곡기. 그래 팥죽 한 그릇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남편과 목포에서 유명하다는 팥죽집 “평화 분식”을 찾았다. 원래 원조는 “가락지”라는 곳인데 검색해본 결과 가락지보다 평화 분식 평점이 높아 평화 분식을 찾았다. 메뉴는 단출하다. 팥 칼국수와 팥죽. 둘 중 하나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입안 끈적이는 새알 옹심이가 싫은 나의 선택은 당연 팥 칼국수. 주문과 동시에 국수를 밀고 팥물을 끓인다. 스테인리스 그릇 가득 팥물이 넘칠 만큼 담겨 나온다. 웬만한 남자가 아니면 다 먹지도 못할 양이다. 붉음이 주는 힘찬 기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서 음식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진다. 흐트러진 몸을 하고 팥물에 몸을 담근 면발을 젓가락으로 짚어본다. 미끌. 면발의 저항이 만만찮다. 면발은 좀 더 붉은 팥물에 몸을 담그고 있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허락할 내가 아니다. 홀치듯 면발을 낚아챈다. 이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면발이 전하는 탄력이다. 좋다. 첫 술은 그대로의 맛을 즐겼다면 이제는 신성한 의식을 치를 때다. 노란 설탕의 뚜껑을 연다. 한 숟갈 가득 황금가루를 떠올려 살살 흩뿌리듯 팥물 표면에 도포한다. 휘휘 조급하지 않게, 하지만 면이 붇지 않도록 재빠르게 저어야 한다. 면발을 피해 한 숟갈 가득 팥물을 길어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맞아. 바로 이거다. 이 달달함. 달달함 속에 깊이 박혀있는 꾸미지 않은 소박함. 입안에 남는 텁텁함은 조금은 시큼해진 김치 한쪽이면 좋고, 마지막 입가심으로 노란 호박식혜까지 있다면 황후 밥상이 부럽지 않다. 줄지 않을 것 같은 그릇의 바닥이 보이면 다음에는 또 언제 먹을까? 하는 마음속 보이지 않는 약속을 잡게 된다.
가게 문을 나서도 마음 한편 팥죽의 온기가 남아 있다. 팥죽은 음식이 아니라 험한 세상 부딪히며 살아가는 연약한 이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든든한 응원인가 보다. 힘내서 살아가라고 시린 인생 속에 건네는 엄마의 따뜻한 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