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는 언제나 서성이는 나를 만난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태양은 초록마저 시름시름 앓게 만든 것일까? 여름앓이를 마친 나뭇잎들은 어느새 노란 진물을 드리우고 낯빛을 조금씩 바꿔간다. 그 낯빛은 뒤돌아가지도 앞서 가지도 못하는 내 어중간한 발걸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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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50이 넘으면 자녀들은 제법 자라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사회적으로는 안정을 누리며, 제2의 인생을 찾아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는 나이라고 누군가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무엇하나 이룬 것 없이 50이란 나이는 몇 해전에 지났고, 안정은 턱없이 멀다. 숫자로 계수된 나이는 새로운 일을 갖기에도 제약이 많다. 주체성 있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 시간들을 탓하며 바라보는 내일은 어둡기만 하다.
다시금 내가 젊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단 하나 이것에 힘쓰고 싶다.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나 자신의 삶을 내 색깔대로 살아내고 싶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급급한 인생이었다는 표현밖에 쓸 말이 없다. 주체적으로 삶을 계획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와 사람들의 이목에 사로잡혀 무엇하나 자유롭지 못한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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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족쇄처럼 나를 얽매여온 것은 "~답다"라는 말이다. 이 답다는 결코 나다운 이 아닌 사회적 직분이나 환경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규정화된 "다움"속에 나는 늘 허우적거렸다. 잘 연기되는 그 다움 앞에 나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과 진정한 나다움을 버렸다. 단지 그것이 전부처럼, 그렇지 않으면 살아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조차 대부분 주입된 것이었지만 이제와 후회를 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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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살아온 시간 안에서 나다움은 한 없이 빗나가 있고 낯선 내가 주인행세를 하는 삶을 만난다. 그 낯섦에 발걸음이 어찌 주춤거리지 아니하랴. 이제라도 주체적인 걸음을 걷고 싶은 발걸음은 둔감해진 몸둥어리가 무겁기만 한가보다.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고픈 건 마음뿐 이목과 책임에 사로잡힌 몸은 비대하기만 하다. 그래도 걸어가 보자. 마음마저 둔해지기 전에 버거운 걸음이라도 걸음을 옮겨 가보자. 한걸음 한걸음 무게만큼 발자국조차 깊이 파이겠지만 언젠가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깃털 같은 그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