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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번외 1.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날의 진실

설사는 대체 언제 멈추는가

by HuwomanB

7월 21일 일요일

욜링암으로 가는 길에 요거트를 하나 마셨다. 그전까지는 큰 볼일을 보지 못하고 있어서 그날 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갈 때만 해도 요거트의 효과가 좋다고 생각했다.


7월 22일 월요일

홍고린엘스에서 사막을 오르는 데 얼마 올라가지 않아 배가 싸르르한 것이 느껴졌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으니 잠깐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나 했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뒤로 그러지 않아서 사막을 잘 오를 수 있었다.

7월 23일 화요일

바양작에 들르기 전 점심으로 호쇼르를 먹으러 갔을 때, 또다시 배가 아파와서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가려했지만 호쇼르가 나오기 직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신호가 와서 엘사에게 200투그릭을 빌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돈을 받는 화장실인데 500투그릭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청소하던 여자아이가 나를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내 뒤에 간 언니는 500투그릭 아니면 안 된다고 못 들어가게 했다는데, 만약에 나한테 그랬으면 정말 그 자리에서 쌌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와 호쇼르를 먹으면서 엘사와 침게에게 계속 설사를 한다고 하니 이따가 약을 주겠다고 했다. 차에 타기 전에 약을 줬는데 검은색 약이었다. 침게가 그 약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몸에 좋은 거야. 똥 안 나오는 사람은 이거 먹으면 똥 나오고, 설사하는 사람은 이거 먹으면 설사 멈춰. 술 많이 마신 다음날 이거 10개 먹으면 안 아파."라고 하는 그 순간 의심이 증폭되었다. 이게 뭐지. 몽골판 호랑이연고인가. 내가 "똥 안 나오는데 나오게 하는 약이면 설사하면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이거 약 맞냐고 재차 물었지만 침게는 계속 좋은 거라고만 했고 옆에 있던 엘사가 "그냥 먹어~"라고 나를 슬쩍 밀었다. 아니 안 먹겠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좀... 설사기가 있다고 한 언니도 그 약을 먹으면서 조금 갸우뚱했지만 방법이 없으니 일단 먹었다.

약을 먹은 후 밤까지는 배가 더 아프지 않아 점심에 먹은 약이 효과가 있는 줄 알았다.



7월 24일 수요일, 그 날의 이야기


새벽

잠을 자다 배가 아파서 일어났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많이 급한 신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중에 최대한 빨리 화장실 갈 준비를 했다.


제발 제발 제발 버텨줘. 조금만 더 버텨줘. 곧 화장실 갈 거야. 제발.


계속 나에게 주문을 걸며 밖으로 나가 게르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은 잘 닫히지 않았고 급한 대로 그냥 안 닫히는 채로 두고 가기엔 게르 문이 너무 활짝 열렸다. 다시 힘을 주어 문을 미는 순간, 내 괄약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힘을 놓았다.

게르 문은 닫혔지만 내 괄약근은 닫히지 않았다. 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걸어갔다. 불도 켜지지 않는 컴컴한 화장실에 앉아 핸드폰 후레시를 켜고 속옷에 묻은, 검은 약 때문에 검은색으로 나온, 묽은 변을 닦으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침

아침은 홍차 한잔만 마셨다. 침게에게 설사 때문에 아침을 못 먹겠다고 하자 밥 먹어서 그런 게 아니니 먹어야 한다고 했다. 밥 때문에 설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설사를 할 때는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먼 길을 가려면 먹어야 하니 그냥 먹고 설사하라고까지 했다. '오늘 새벽에 그 사태를 겪었는데 내가 밥을 먹고 싶겠니. 먹고 설사를 하라니. 그건 대체 무슨. 하..' 욱하는 기분을 겨우 누르고 그래도 밥은 못 먹겠다고 하니 침게는 그제야 내가 정말 배가 아프고 내 설사가 심하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았고 내 상태를 살피는 표정으로 어제 준 약과는 다른 흰색의 약을 주려고 했다.

검은 약을 먹고 겪은 새벽의 악몽이 떠올라 침게가 새로 주려는 약을 믿을 수 없었고 그때는 이미 언니가 준 지사제를 먹은 후여서 그 약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침게는 갑자기 콜라를 마시면 낫는다며 콜라를 마시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짜증을 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차에 탈 때가 되자 침게는 다시 나를 붙잡고 어제 보드카 사지 않았냐고 보드카를 마시면 바로 낫는다는 말을 했다. 정말 거절할 가치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게.. 나 어제 보드카 마셨어.. 그리고 새벽에 너무 급해서 속옷에 쌌어.. 보드카 소용없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차에 타고 나서도 침게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까 주려고 한 그 흰 약이 정말 좋다며 계속 먹으라고 했다. 다른 약 먹어서 그건 점심 먹고 먹을게요 하니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대화는 끝나지 않았고 '흰 약이 좋다 먹어라.', '점심 먹고 먹겠다.'를 세 번은 반복하니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점심

나는 의문이 하나 생겼다. 왜 어제는 검은 약이고 오늘은 흰 약인가.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침게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이거 왜 어제 준 검은 약이랑 다른 거예요?"

"이건 약이야."

"그럼 어제는 약 아니었어요?"

"응 아니었어. 그건 음 그냥 좋은 거야. 그건 그 배에 좋은 비타민 같은 거야. 유산.. 뭔데, 그게 한국말로 뭐지."

"유산균?"

"응. 유산균!"


아 유산균. 설사할 때 지사제 없이 유산균을 주면, 다 뱉고 죽으라는 건가. 그래서 새벽에 내가 그 고생을...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는 침게가 미웠다. 내가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한다고 말했음에도 침게는 그냥 본인 판단으로 내 상태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밥을 안 먹으니 그제야 제대로 파악을 한 듯했다.


'내가 배 아프다고, 설사 한 지 2일이나 됐다고 했는데!! 유산균을 줬다고? 그리고 이제야 제대로 된 약을 준다고?!' 정말 허탈했다. 새벽의 컴컴한 화장실에서 속옷을 닦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침게에게 받은 흰 약을 먹을까 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지사제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한번 더 침게를 믿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흰 약은 진짜 약이 맞는 것 같았다. 이 약도 이상한 거였다면 난 아픈 사람에게 뭐 하는 거냐고 진짜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7월 25일 목요일

약을 먹으니 조금 나은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쳉헤르에 가서도 설사는 계속되었다. 신기한 건 마시면 바로 설사를 한다는 마유주를 먹고 나선 설사를 하지 않았다.


7월 26일 금요일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날, 돌아가는 동안 배가 아프지 않았다. 이제 정말 다 나은 건가.


7월 27일 토요일

새벽, 쿠브스굴 레이크 호스텔에서 나오기 전 나는 또 화장실로 뛰어갔다. 공항에서도 한번 더 화장실을 갔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집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실수를 할까 봐 전철 화장실에서 한번 더 볼일을 봤다. 그러면서 번외로 설사 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7월 29일 월요일

내일이면 출근. 오전에 통화로 잠깐 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휴가가 정말 끝나는구나. 카페에서 여행기를 마저 쓰고 있다. 나의 설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7월 31일 수요일

약국에 가서 지사제를 샀다. 지사제를 달라고 하자 지사제와 장 내 환경 회복을 위해 함께 먹어야 한다고 유산균이 함유된 약을 같이 줬다. '침게가 유산균을 준 게 아예 엉터리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월 2일 금요일

묽은 변이 끝나가는 것 같다.


8월 5일 월요일

주말에 서핑을 다녀오니 설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8월 6일 화요일

결국 병원에 갔다. 2주 정도 지속되었다고 하자 장염 약을 처방해 주며 약을 먹고도 2주 이상 더 지속되면 대장내시경을 해보자고 했다.


8월 8일 목요일

역시 약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이 최고인 것 같다. 길고 긴 사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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