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강소브라가에서 묵은 게르가 가장 안 좋았던 것 같다. 게르 상태로는 두 번째로 안 좋지만 샤워시설을 고려하면 가장 안 좋은. 물은 굉장히 졸졸 나와서 비누가 제대로 씻기긴 한 건지 잘 모르겠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씻고 나왔다.
게르
우리의 게르는 4인용이어서 침대도 4가 있었다. 가운데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는데 그 외에 다른 공간은 매우 좁아서 캐리어 3개를 한 번에 펴지 못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짐을 놓을 곳이 없어 남는 침대 하나를 짐 놓는 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게르는 바닥 쪽 벽 두 군데와 천장이 뚫려있는데 천장은 천으로 덮을 수 있는 구조였다. 여름엔 천장을 열어 바람이 아래서 위로 통하게 하여 시원함을 유지하고 겨울에는 천장을 덮어 바람이 통하지 못하게 하여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하지만 밤에 게르 안에 불빛이 보이면 온갖 벌레들이 들어온다는 후기가 있어 나는 침게에게 해가 지기 전에 천장을 덮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참게는 "벌레 안 들어와." 하면서 닫지 못하게 하려다가 내가 두 번 정도 말하자 "더울텐데 괜찮겠어?" 하며 천장을 닫아주었다. 침게가 직접 닫아주었고 나는 옆에서 방법을 익혔다. 그다음 게르부터는 천장에 방충망이 함께 있는 식으로 개조되어 있어 일부러 닫을 필요가 없었고 엉기사원 근처에 있던 게르만 천장이 개조되지 않은 게르여서 내가 직접 닫았다.
게르 안에는 이미 나방이 들어와 있었다. 처음엔 한 마리도 보기 싫었는데 해가 질수록 사방이 나방이었고 이 불빛 저 불빛 사이를 날아다니며 내 머리를 주기적으로 쳐서 포기했다. 그러니 싫은 마음도 사라지고 익숙해졌다.
저녁
삼겹살. 상추와 고추장까지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김을 뜯었는데 헤라가 김을 엄청 좋아했다.
고기를 굽는 침게. 기다리는 언니와 동생. 저녁을 먹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몽골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가 "몽골에 돼지고기는 없어요? 아 삼겹살 먹고 싶은데..." 해서 '몽골에서는 주로 소 아니면 양인데 어떡하지. 돌아올 때까지 괜찮으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행히 이날 저녁 바비큐 재료는 삼겹살이었다. 언니와 비슷하게 첫날 삼겹살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걸까.
침게가 "삼겹살엔 술인데." 하면서 고기를 구웠고 헤라는 앉아서 고기를 집으며 한국말로 "소주 알아요? 삼겹살엔 소주, 맞아요?" 라며 말을 걸었다. 헤라는 이따금씩 우리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엘사나 침게보다 완벽한 발음으로 말했다. 침게가 헤라가 한국말도 잘한다고 한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침게와 헤라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그러게, 어차피 남으면 차에 싣고 다니면 되는 건데 보드카도 사고 맥주도 더 담을걸.."하고 후회했다.
언니는 마른 몸에 비해 정말 잘 먹었다. 동생과 내가 에어배드를 피러 가자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거까지만 먹어야지."를 몇 번을 반복했던 것 같다. 동생과 나는 다시 앉았고 만약 아까 진짜 일어나서 들어갔으면 언니 더 먹고 싶은데 혼자 속으로 엄청 아쉬워했을 것 같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에어배드
해가 졌고 우리는 에어배드를 피고 누워 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에어배드에 바람을 넣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냥 들고 달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바람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고, 들어가도 다시 나왔다. 한참을 달리는 우리를 헤라, 엘사, 침게가 지켜보며 재미있다고 웃었다. 침게는 와서 도와주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구경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주변을 보니 다른 게르에 있는 한국 청년들이 에어배드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무슨 비결이 있나 싶어 가서 물어보니 방법은 없고 그냥 달려야 한다고. 그때부터 차강소브라가 게르 배 에어배드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한 명이 에어배드를 높이 들고 원을 그리며 달리면 그 뒤를 따라 다른 한 명이 달리고 나를 포함한 5명 정도가 함께 원을 그리며 돌았다. 재미있어 보였는지 게르 주인의 딸인 듯한 아이가 와서 같이 뛰기도 했다.
한참을 뛰다보니 같이 물어보러 온 언니가 보이지 않았고, 우리 게르 쪽에서 달리고 있었다. 큰 소득 없이 우리 게르 근처로 왔다. 바람이 어느 정도 들어가는데 고정할 방법을 몰랐다. 고정 방법을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냥 죽어라 달리다가 와버렸구나. 동생이 바람이 들어가는 입구를 돌돌 말면 고정이 된다고 하여 바람 넣는 부분을 돌돌 마니 에어배드 내부 부피가 작아져서인지 에어배드가 더 팽팽해졌고 바람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위에 누우면 말렸던 부분이 풀리며 바람이 다시 빠졌다. 뭐지 대체 어떻게 고정하는 거야!
그 때 돌돌 만 입구 끝에 있는 버클이 보였다. 이건 그냥 에어배드 포장용인 줄 알았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채워 볼까. 딸깍. 에어배드 안에 바람이 갇히고 더이상 빠지지 않았다. 됐다. 언니와 동생에게 방법을 알려주었고 우리 모두 에어배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맥주를 가지러 게르로 돌아갈 때 우리를 구경하다 진전이 없어 지루했는지 본인들 게르에 들어가 있던 엘사와 침게가 나오면서 "파이팅했습니까?"라고 물어봤다. 성공했냐는 물음인 것 같아 우리가 만든 에어배드를 보여주었다. 엘사와 침게는 "오 파이팅! 파이팅!" 하며 지나가던 헤라에게도 우리가 성공한 것을 알렸다.
별과 나방
□ 별
에어배드에 누워 맥주를 한 캔 마시다 보니 별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구름이 조금 껴 있어서 구름이 없는 부분에만 별이 보였는데 생각보다 적어서 이 정도면 한국이랑 비슷한 거 아닌가, 카메라 노출에 속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니 별들은 나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친듯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릴 적,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는 노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별은 아주 작은 점으로 그냥 있을 뿐인데 대체 어디가 반짝인다는 것인지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의 감수성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별은 정말로 반짝였다. 약해졌다가 강해졌다가. 별은 태양계로 치면 태양과 같은 항성이니 태양처럼 강해졌다가 약해졌다가 하면서 반짝이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빛 공해가 가득한 도시의 하늘에서는 도저히 그 변화를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 11시가 되자, 한 블로그에서 읽었던 별을 덮고 자는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 별은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앞, 뒤, 양옆 사방이 별이었다. 넓게 뻗는 초원, 시야를 가리는 건물들도, 어둠을 방해하는 불빛들도 없으니 별들은 더욱더 신이 나서 나왔다. 감성적인 표현을 모르겠어서 현실적으로 비유하자면, 검은 선글라스에 흰 먼지가 잔뜩 묻은 것 같이 별이 많았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별똥별도 떨어졌는데 별똥별을 본 것에 놀라는 사이 사라져 소원을 빌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더이상 떨어지지 않고 움직이는 비행기를 별똥별로 착각하기도 해서 동생이 아까도 비행기 잘못 본 것 아니냐고 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별똥별이었다. 내가 별똥별을 보다니. 아쉽지만 소원은 남은 날 중에 꼭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탄의 시간도 잠시, 달이 뜨기 시작하고 별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달빛이 이렇게 밝았던가. 동생은 옛날 사람들이 달이 뜨면 달빛에 의지해 길을 갔다는 말을 안 믿었었는데 사실이었나 보다고 했다. 별이 점점 사라지고 처음 해가 졌을 때 정도밖에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는 게르로 들어가 잠을 잤다. 별이 그렇게 많이 떴음에도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이 아니라 은하수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음날 침게에게 은하수를 못 봐서 아쉽다고 하니 아직 첫째 날밖에 안 지났고 사막으로 갈수록(홍고린엘스, 고비사막) 별이 더 잘 보이니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다.
□ 나방
언니와 동생은 각각 미러리스와 DSLR로 별 사진을 시도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동생은 홍고린엘스에서 별 사진 찍기에 성공했다.) 언니는 미러리스 삼각대를 설치하려고 잠시 휴대폰 후레시를 켰는데 나방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언니,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게르에서 하는 게 방해 안 받고 좋을 것 같아요."라고 하자 언니는 게르에 들어갔지만 결국 실패했고 포기하는 듯하더니 다시 후레시를 켰다. 하지만 삼각대가 셀카봉 겸용이라 약해서 미러리스를 지탱하지 못했고 나방들만 더욱 달려들었다. "아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란 말이다." 불빛에 신나서 놀자고 달려드는 나방에게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방은 옆에 있던 나의 머리를 사정없이 치며 불빛을 향해 날아갔다. 시간이 갈수록 그냥 나방이구나.. 하는 생각 외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게르에 잠시 담요를 가지러 들어갔는데 게르 안에 있던 나방이 내 휴대폰 후레시로 날아왔다. '얘를 한번 내보내 볼까?' 하는 생각에 게르 문을 살짝 열고 휴대폰을 밖으로 내밀었지만 안에 있던 나방은 문에 붙어 나가지 않고 밖에 있던 나방만 두 마리 더 들어왔다. '그래, 같이 자자.'
별을 다 보고 게르로 들어왔을 때 침낭을 깔기 위해 후레시를 다시 켰더니 4마리 정도가 날아왔다. 그래서 휴대폰을 한쪽에 두고 거기서 나방을 놀게 한 뒤 침낭을 깔고 불을 다시 껐다. '나방들아 내일 보자.'
몽골의 정2.
별을 보던 중 동생이 "언니 내 휴대폰 가지고 있어?"라고 물었다. "아니? 나한테 다시 안 줬는데? 아까 잠깐 맡겼다가 다시 가져가고 그 뒤로 안 줬을걸?"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불안했다.
블루투스에서 노래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 멀리 있진 않는 것 같은데 게르에도 없고 에어배드 안에도 없었다. 바닥 어딘가에 있는 건가. 후레시를 켜고 나방들과 함께 휴대폰을 찾았다. 엘사와 침게가 무슨 일이냐고 해서 휴대폰을 찾고 있다고 하자 그 둘도 함께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다른 팀의 가이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엘사가 설명하는 듯했다. 그 가이드는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에어배드도 들었다가 놨다가 하면서.
민망해진 동생은 그만 찾아도 괜찮다고 근처에 있으니 내일 아침에 해 뜨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못 찾아도 상관없다고 몇 번을 말하며 가이드들을 돌려보냈다. 12시가 넘은 시각, 본인의 팀도 아닌데 더 적극적으로 걱정하고 찾아주는 모습이 생소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바닥을 조금 찾아보는 듯하다가 걱정을 하며 해 뜨면 찾아야겠다고 먼저 제안하고 가지 않았을까.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돕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몽골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상대방이 처한 어려움이 크고 작고에 관계없이 그 본능은 모든 순간 발휘되었다. (가이드들이 다 돌아간 뒤 동생의 휴대폰은 에어배드 근처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7월 20일 새벽 1시 30분 비행기 탑승부터 7월 21일 새벽 1시 게르 안 침낭에 들어갈 때까지, 정말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