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스탈린이 독일을 먼저 공격했다면?

만약의 역사 4부

by kim

“스탈린은 히틀러를 믿지 않았습니다. 악마의 계약은 무한하지 않았고 그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을 봉쇄하기에 이릅니다. 영국의 처절한 저항에 히틀러는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공세 능력을 침몰시키고 남부의 제공권을 가져가 서유럽 전선의 붕괴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흠모하던 영국을 넘어섰다고 확신했고, 조금만 더 압박하면 처칠도 결국 무릎을 꿇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이미 독일 내에서는 구세주였습니다. 그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유대인들의 학살도 이루어지면서 그는 순혈 게르만을 위한 제국이 가까워졌다고 망상에 빠집니다. 히틀러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나치당을 만들 때부터 레벤스라움의 최종 목표이자 궁극의 적인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대서양 넘어 히틀러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1941년 3월 11일 방관자일 것만 같던 미국의 무기 대여법이 통과된 것입니다. 지원 국가 중에선 영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미국을 프랑스처럼 선언만 요란하고 실제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많은 군의 장성들은 미국의 지원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주장하지만 히틀러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패배주의라며 그들을 질책하거나 해임합니다.


히틀러는 이제 영국은 몰락하였고, 남은 적은 소련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군의 통제권을 본인이 주도하여 이끌고 싶었고, 적어도 영국의 봉쇄를 통하여 처칠의 무릎을 꿇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서유럽의 몰락을 본인이 이끌어 다시 한번 프랑스처럼 승리를 맛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봉쇄에 큰 공을 가진 괴링은 히틀러에게 언제나 달콤한 말만 하며 본인의 권력을 음미하고 있었고, 그런 괴링은 전선보다 베틀린의 파티에 더 관심을 가지며, 그 공백은 전선 전체에 명확한 혼선을 불러왔습니다.


그 무렵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은 바람의 촛불이 된 영국의 모습을 보고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미 대숙청의 영향으로 겨울 전쟁에서 겨우 승리한 적이 있는 그는 히틀러의 멈출 줄 모르는 야망은 언젠가 저지해야 하는 불씨와 같았습니다. 스탈린은 고뇌하기 시작하고 현재 독일의 기세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히틀러를 믿지 않았습니다.



악마의 계약은 무한하지 않다 판단하였고, 그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탈린은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1941년 4월 말부터 소련과 독일의 국경사이에는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스탈린의 함정이었습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그저 작은 국경충돌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였으나, 독일 국경의 병력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스파이를 통해 독일의 지도부는 현재 영국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나치독일 역시 소련에 스파이를 보냈지만 철저한 보안에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합니다. 스탈린과 군부는 4월부터 군을 집결시키고 있었지만 처칠의 무릎을 꿇리는 것만 집중하던 히틀러는 그런 스탈린의 함정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6월 12일 새벽 4시 폴란드의 브레스트 요새에서 붉은 군단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제15기계화군단과 제3기계화군단의 45만이 넘는 병력과 1000대의 전차 그리고 500대 이상은 전투기가 독일의 국경이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향했습니다. 바다처럼 몰려오는 소련군과 비처럼 쏟아지는 폭격과 함께 독소불가침조약은 이제 한낱 종이로 변모하게 됩니다.


소련의 빠른 진격속도에 폴란드의 바르샤바는 다시 한번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6월 15일 겨우 3일 만에 폴란드의 바르샤바에는 소련군이 입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국경은 초토화되었고 동프로이센은 소련의 진격을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압도적인 인해전술에 준비되지 못한 독일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도 6월 18일에 점령되었습니다.


그 소식은 히틀러에게는 믿기 힘든 충격이었습니다. 스탈린의 대숙청 이후 핀란드를 상대로도 고전한 소련의 군사력에 히틀러는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월 14일 히틀러는 소련의 공격을 명분으로 독일 육군이 소련의 영토에 들어갈 수 있는 명분이 생겼고 빠르게 지휘체계를 확립했습니다.


6월 21일 중앙집단군의 펫도어 폰 보크 그리고 프랑스를 정복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 그리고 영국 봉쇄에 큰 공을 세운 괴링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 외에도 북부 집단군의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남부 집단군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도 지휘에 참여하였고 거의 모든 장성급 장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던 독일의 군대를 동부로 이동시켰고 아프리카의 상황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맡겼습니다. 영국의 봉쇄와 대서양의 견제를 위해 아프리카에 있던 에르빈 롬멜 역시 유렵으로 배치받게 됩니다. 이제 히틀러는 준비를 마치고 다시 한번 나치는 레벤스라움을 위한 진군을 시작합니다.


소련은 브레스트에서 바르샤바 방면으로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방향으로 총 2가지 루트로 독일군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6월 25일 소련군은 처음으로 공세가 막히기 시작합니다. 25일 새벽 소련군이 맞이한 하늘은 괴링의 루프트바페 즉 공군의 슈투카가 하늘이 찢어지는 사이렌과 함께 폭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숙청의 여파로 지휘 체계에 가장 큰 혼선을 가진 건 소련의 공군이었습니다.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육군을 포함한 공군의 베테랑 파일럿 및 지휘관들 역시 숙청 대상이었고, 이 여파로 인해 지휘체계는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폭격으로 전장을 초토화하고, 전차의 빠른 기동력 그리고 포격으로 전선을 장악한뒤 뒤따르는 독일군의 진군은 소련군에게는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구데리안의 전술은 소련군을 빠르게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전장에는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했던 구데리안의 독일군이 바르샤바로 향하면서 소련군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1941년 7월 10일 6월 중순부터 공세를 지속한 소련은 지휘 체계의 혼선과 보급의 한계 그리고 전선의 확산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구데리안은 남동부의 루블린에서 브레스트 루블린 바르샤바 라인을 공격하였고, 같은 날 귄터 폰 클루게의 제4군이 기동방어 및 국지 반격을 지휘하며 북부, 중앙 전선을 보강하였습니다. 그리고 제16군의 에른스트 부슈가 북부 방면에서 소련의 기계화 군단의 측면을 공격하여 바르샤바로 진입하는 병력을 분산시켜, 바르샤바를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동프로이센에서도 독일의 제18군 그리고 제4군이 30만 이상의 병력과 800대 이상의 전차를 이끌고 반격합니다. 소련은 갑작스러운 폭격과 포격 현대전의 교과서 같은 독일의 전술에 제3기계화군단이 고립이 되고 7월 20일 쾨니히스베르크를 해방시킵니다. 제3 기계화 군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발트 특별관구의 북서전선이 붕괴하게 됩니다. 잡힌 포로만 20만 명에 육박하였고, 소련은 결국 리투아니아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구데리안은 7월 25일 바르샤바를 다시 해방시킵니다.


북부 전선이 안정화되고, 독일은 소련을 3방향으로 압박하게 됩니다. 북부집단군레닌그라드로 향하고 있었고, 중앙집단군모스크바 그리고 남부집단군키이우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펫도어 폰 보크의 중앙 집단군은 선두의 구데리안과 함께 빠르게 소련의 전선을 무력화시켰고,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바로 앞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게 됩니다.


1941년 9월 8일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었고, 이제 소련은 바람 앞의 촛불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북부집단군은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막히게 됩니다.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저항하는 사이 중앙 집단군은 소련으로 막힘없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큰 규모의 손실을 입게 됩니다. 거의 500만에 육박하는 병사들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됩니다. 이제 독일군은 소련의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이제 모스크바의 3중 방어선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선두에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단과 헤르만 호트의 제3기갑군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부 집단군이 키이우 공방에서 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히틀러는 구데리안에게 잠시 병력을 재정비한 뒤 구데리안을 우크라이나에 투입하게 만듭니다. 하인츠 구데리안의 독일군이 투입되었고, 브레스트~루블린을 통해 남하하여 8월 17일 전차를 이끌고 드니에프르 북단을 따라 진격했습니다. 동시에 남부집단군이 남쪽에서 전차를 병진시켰고, 이들은 드네프르 강 만곡부를 따라 그대로 북상하여 키예프 남단에 도착합니다.


결국 9월 13일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은 동부 로흐 비챠에 도달하게 되고 포위망이 형성됩니다. 9월 13일 키이우를 중심으로 독일군의 포위가 완료되고, 곧 소련군은 키이우를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탈출은 저지되고 9월 26일 소련의 제5, 21, 26, 37군, 38, 40군의 전면 항복이 이루어집니다. 30만 명의 소련 병사가 사살되고 65만 명의 포로가 된 독일의 대승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구데리안과 중앙집단군은 정비를 마치고 모스크바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스크바 밖에서 독일 전차의 무한궤도 소리가 엔진소리와 함께 대지에 울려 퍼집니다. 독일이 이제는 바로 앞입니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의 바로 앞이었고 독일의 중앙집단군은 총 병력 190만, 각종 대포 1,400문 전차 2,000대 전투기 780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500만이 넘는 피해를 봤고, 이미 모스크바에 집결된 가용 가능한 병력은 125만, 전차 1,000대, 대포 7,000문 그리고 전투기 900기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전투기 역시 가용가능한 전투기들은 독일에 비해 한없이 적었고, 질과 양으로서 소련은 독일에 비해 부족했습니다.


10월 2일 드디어 독일군의 모스크바 점령이라는 작전을 개시합니다. 중앙 집단군의 사령관인 펫도어 폰 보크는 11월 7일 이전까지 작전을 완료한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겨울은 매우 혹독 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빠르게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10월 둘째 주부터 시작된 라스푸티차 즉 가을장마로 인해 땅이 진창으로 변해 전진 그리고 보급이 원활하게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양익 전법을 이용하여 모스크바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남서전선이 붕괴되고, 모스크바가 위협을 받게 되자 스탈린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키이우의 사수를 명령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고, 이제 독일군들은 모스크바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대대적인 지휘부 교체에 들어가게 됩니다. 10월 10일 스탈린은 할힌골 전투와 레닌그라드를 훌륭하게 방어해 내 큰 활약을 보여줬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주코프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들은 예비군만 충분하다면 모스크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모스크바의 방어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합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 몰려드는 독일군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장성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모든 정부요인들을 모스크바를 떠나 볼가 강의 하류에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이 많았고, 대부분 모스크바를 탈출하게 됩니다. 10월 13일 고위 관료들의 탈출에 모스크바의 치안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0월 15일 당일 스탈린은 탈출을 거부합니다. 크렘린에서 끝까지 버티겠다는 그의 의도는 현재까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행동이 소련군과 모스크바시의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패색이 짙어지던 모스크바는 치안이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25만 명이 동원되고 도시를 요새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0월 둘째 주부터 가을장마의 시작으로 라스푸티차가 시작된 이후부터 독일의 진격속도는 확연히 느려집니다. 이때부터 소련의 기갑부대가 전선에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군수공장에서 급하게 만든 소련의 T34는 독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소련의 병사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끝없이 병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우리에게 친애하는 모스크바는 귀중하다. 불파의 장벽으로, 철통의 수비로, 적을 궤멸시키고 격퇴할 것이다!” - 당시 소련에서 금기와 같던 애국주의 호소하는 곡 모스크바 방위곡 중 일부 가사


소련의 인민들은 그리고 군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치독일이 슬라브, 유대인 그리고 포로들에게 어떤 비인간적인 처사를 하고 있었는지는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독일군의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마을 하나씩 점령이 될 때마다 인민들은 피난하면서 삶의 터전이었던 마을들을 남김없이 불태웠고, 우물을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독일군은 그저 빈 허허벌판에 깃발을 꽂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스푸티차 그리고 소련의 병사들과 인민들의 저항에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는 라스푸티차가 끝날 때까지인 10월 29일까지 모스크바의 전방 120km 정도까지 밖에 전진하지 못합니다. 결국 11월이 도래하고 라스푸티차는 끝났지만 이제 독일군들을 기다리던 건 소련의 겨울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소련의 겨울은 아주 혹독하게 추운 겨울은 아니었습니다. 평균적인 겨울이었고, 정상적인 동계장비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 없는 계절이었으나 독일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병사들은 하계군복을 입고 있었고, 전차와 차량들의 엔진을 위한 부동액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선두의 구데리안이 동계장비에 대한 요청을 하였으나 중앙집단군의 사령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소련군도 초기와 달리 다중 방어선으로 10월에 비해 훨씬 더 촘촘한 방어선으로 독일군에게 저항을 하였고, 이는 독일 병사들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도 동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독일 병사들은 동상 환자가 수십만에 육박했습니다. 장비는 얼어붙기 시작했고, 동복이 없는 독일군들은 소련군의 시체에서 동복을 가져와보기도 하였지만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발진티푸스등 전염병이 돌아 설사로 인한 탈진으로 독일군들은 더욱 지쳐갔습니다. 열악해지는 환경에서 소련의 주코프는 기회를 노립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전진하였습니다. 독일의 정찰대는 크렘린궁이 보이는 힘키 즉 붉은 광장과 멀지 않은 전방 30km까지 전진을 하였지만, 본대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게 독일군이 마지막으로 본 크렘린이었습니다.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한 소련의 예비군은 110만에 육박하였습니다. 12월 5일 드디어 소련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소련군은 기갑부대와 공수부대 그리고 스키부대까지 편성하였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독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독일군은 12월 14일부터 후퇴를 시작하였고 12월 16일 히틀러에게 후퇴를 완전히 승인받았습니다. 소련 역시 무리한 공세를 통해 전선은 고착화가 되었지만 위기는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격노하게 됩니다. 그저 지도로만 전장을 보던 그는 모스크바를 목전에서 놓치게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공세를 할 수 없는 병사들의 현실을 알 수 없었고, 작전 실패의 모든 책임을 현장을 지휘한 지휘관들에게 떠넘깁니다. 구데리안이나, 펫도어 폰 보크등 많은 인사들이 해임되거나 스스로 물러났고, 히틀러는 본인이 직접 군을 지휘하는 육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그의 오만은 사라지지 않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 주위 지휘관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히틀러는 직접 전선을 그리며 육군의 모든 지휘를 맡았지만 그는 전문성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히틀러는 곧 석유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공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히틀러의 골칫거리는 소련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였고, 이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한다는 보고였습니다. 독일은 12월 11일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미국을 그저 정신력이 약한 자본주의 국가로만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군대의 총지휘를 맡은 건 아이젠 하워였습니다. 그와 참모진들은 유럽이 더 이상 유린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작전 회의에 참가한 조지 S 페튼 장군에 눈에 보인 지역은 바로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위의 새하얀 도시 알제가 있는 알제리였습니다.



정신력을 강조하던 독일군은 결국 소련인민들과 군인들의 애국주의와 나치독일을 향한 분노가 담긴 저항에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동방의 곰은 잠시 상처를 핥으며 아퀼라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의 괴물 독수리는 창공을 가르며 발톱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몰락이 시작됩니다.


*위 내용은 실제 역사 사건과는 무관한 저의 상상으로 쓴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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