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의 역사 5부 – 반격

만약의 역사 5부

by kim
“하얀 도시 알제... 지금은 모래 폭풍이 사막을 휘몰아치고, 미국의 M4 셔먼 전차들이 그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11일,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작전 참모들은 유린당하는 유럽의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영국이 대서양을 중심으로 독일을 밀어내기에는 아직 독일의 함대와 공군이 대서양을 막고 있었습니다. 참모들 중에는 조지 S. 패튼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패튼의 눈에는 오직 하나의 도시만 보였습니다. 바로 알제리의 순백의 도시 알제입니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31일 오후 10_44_38.png


미국은 1942년 1월 5일 북아프리카에 주둔하던 영국의 제8군 몽고메리 장군의 협력아래에 북아프리카에 대규모 병사를 배치하여 유럽을 압박할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미국과 몽고메리의 접촉을 비판하며 프랑스 함대의 다를랑에게 이탈리아의 함대와 함께 협력을 요청하였습니다. 비시 프랑스의 다를랑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다를랑은 이미 1942년 2월 11일 연합군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 함대를 강제 합병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나치 독일은 이미 비시 프랑스를 직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점점 숨통을 점점 조여 왔고, 다를랑은 영국의 배신 행위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비시프랑스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히틀러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주축에 미국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5월 3일 그는 미국의 아이젠 하워와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역시 아프리카 주위의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부담이 되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다를랑의 접촉에 굉장히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 프랑스의 드골과 미국의 패튼은 그는 다시 배신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배신 행위에 대한 연합군의 의견은 가지각색이었고, 그런 움직임은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 사이의 갈등을 넘어 프랑스 함대 내에서도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다를랑의 행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의 총사령관은 다를랑이었고, 그와 연합군의 협의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를랑은 연합군에게 항복의 대가로 북아프리카 지역의 군사 및 정치분야를 총괄하는 고등 판무관의 자리를 협상하였습니다. 그러나 7월 24일 그의 배신 행위에 분노를 느낀 프랑스 청년에게 알제리의 여름궁전 그의 집무실에서 암살당합니다. 그를 암살한 청년은 나치에 협력하는 태도에 분노를 느낀 왕정복고주의자였습니다.


"DARLAN SHOT DEAD BY FRENCHMAN IN ALGIERS! 다를랑 알제리에서 프랑스인에게 암살 당하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기사


비시 프랑스의 큰 주축이었던 그의 죽음에 프랑스군은 구심력을 잃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8월 3일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연합군과 북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협동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의 함대에 눈독을 들이던 독일 육군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였고, 주력함대가 있던 툴롱항은 기뢰로 이미 탈출로가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비시 프랑스의 지도자 필리프 페탱은 비밀리에 연합군에게 함대를 넘기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현장 지휘를 하던 라보르드 제독은 거부하였으며, 8월 10일 독일의 육군이 항구에 도착하여 교전이 시작될 때 함대의 자침 명령이 이루어집니다. 전함 3척, 순양함 7척 그리고 구축함 15척을 포함한 77척의 배가 자침 되었으며, 독일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주력함대 역시 이미 유럽을 탈출한 뒤였으며 일부 전함과 함선은 연합군 소속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툴롱 항구의 불길.png


독일은 서부전선과 비시 프랑스에 많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이미 영국은 봉쇄가 되어 있었고, 비시프랑스의 페탱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스탈린만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패배는 무능한 장군들의 패배이지 자신의 패배가 아니라 생각하며, 직접 군을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 21일 그는 스탈린의 위세와 자존심을 꺾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는 스탈린 그라드를 공격하였습니다. 서부전선의 모든 방어는 이탈리아와 일부 독일의 병사들에게 서쪽 전선을 맡겨두었지만, 히틀러의 큰 실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군사적으로 무능했습니다. 이미 1930년대에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의 침공과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군수적으로 이탈리아의 군수사업은 사실상 고갈되었고, 전략물자들은 노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를 통하여 연합군이 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고, 설령 온다 하더라도 독일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방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저 권세에 취해 사치를 즐기고만 있을 때 대서양을 넘어오는 독수리의 날갯짓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미국 아이젠하워와 영국의 몽고메리 그리고 자유 프랑스의 드골의 부대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그리고 알제리의 오랑, 그리고 알제에 상륙하는 작전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조지 S 패튼 장군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상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이드 프랜덴달 소장의 군대는 알제리의 제2의 도시 오랑으로, 케네스 앤더슨 중장이 수도 알제로 상륙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패튼의 미 육군 제2기갑사단, 육군 제3보병사단, 제9보병사단을 포함한 3만 5천 명의 서부군과 프레덴달의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1보병사단, 제509 공수연대를 포함한 1만 8천5백 명의 중부군, 앤더슨의 영국 육군 제78보병사단 예하 2개 대대와 미 육군 제34보병사단 및 코만도 부대를 포함한 동부 군이 동시에 상륙을 계획합니다. 해군은 헨리 켄트 휴이트 소장이 서부를, 토머스 트루브리지 준장이 중부를, 해럴드 버로 영국군 중장이 동부를 맡았습니다.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지휘를 맡은 몽고메리 장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군을 압박하였고, 그들의 최종 목적지를 튀니지였습니다. 독일의 룸멜과 여러 번 전투를 통해 맞붙었던 그는 룸멜이 없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은 이미 약해져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를 압박하여 유럽 전선으로 올라가 봉쇄된 고국을 구하기 위하여 움직였습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 군대는 북아프리카에 주둔하던 비시 프랑스의 장교들과 연합하여 독일과 이탈리아군을 북 아프리카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물밑으로 작전을 짜고 있었고, 1942년 10월 23일 자유프랑스 군과 연합한 비시 프랑스 군대의 기습으로 상륙작전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부의 카사블랑카에선 이탈리아와 일부 전향하지 않은 프랑스 군 그리고 독일군이 미국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사보타주와 동시에 후방에서 공격하는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방어는 하지 못했습니다. 오랑 역시 대부분의 프랑스 군들은 전향을 하였고, 알제 역시 사상자 없이 미군이 상륙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빠르게 독일군과 이탈리아군들을 격퇴하며 튀니지로 향하고 있었고 10월 30일 드골과 패튼은 알제리의 하얀 도시 알제에서 만나게 됩니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31일 오후 10_54_54.png


하얀 도시 알제... 지금은 모래 폭풍이 사막을 휘몰아치고, 미국의 M4 셔먼 전차들이 나치독일의 전차대신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의 제8군이 튀니지를 향하고 있었고, 드골과 패튼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의 잔당군을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11월 3일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먼저 튀니지에 진입하였습니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전장의 지휘를 맡은 이탈리아 장교들은 무능하였고, 독일군의 유능한 장교들은 유럽 본토에서 영국의 봉쇄를 위하여 대부분 본토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본토의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 주둔하던 병사들에게 그저 후퇴금지 명령만 내릴 뿐 반격을 할 수 있는 작전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11월 15일 튀니지의 튀니스에서 드골과 패튼이 입성을 하게 됩니다. 11월 16일 몽고메리와 그리고 드골, 패튼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아이젠 하워는 점점 더 과감하게 작전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루스벨트는 이제 처칠과 같이 전장을 보며 미국과 영국 중심의 연합군을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비시 프랑스의 페탱은 드골이 얼른 프랑스를 해방시켜 주길 바라고 있었고, 히틀러는 스탈린과 대결에 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31일 오후 11_01_03.png


무솔리니는 이제 칼 끝이 점점 본인의 목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지며 그의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의 품속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의 두려움이 섞인 눈엔 불타는 로마가 보였습니다.


*위의 내용은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저의 상상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