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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Oct 31. 2022

여덟 개의 산, The Eight Mountains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 #2

국가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공동연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영상예술이지만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시적이면서도 정교한 이야기를 만날 때 시각적인 영상미에 더해 뿌듯한 충만감을 맛본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여덟 개의 산>이 그랬다. 원작이 있는 영화는 확실히 깊이가 다르다. 장엄한 산과 자연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두 친구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영화는 두 친구의 오랜 우정을 그리고 있다.

피에트로와 브루노. 둘은 나이만 같을 뿐, 사는 곳도, 성장 배경도, 하는 일도 다르다. 알프스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그라나. 거기서 둘은 열한 살이 되던 해부터 매년 여름철 두 달을 함께 보낸다. 피에트로의 부모가 여름 한 철 지낼 곳으로 그 마을에 있는 집에 세를 얻으면서부터이다. 여름에만 잠시 들렀다가 밀라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피에트로와 달리, 브루노에게는 그곳이 생활의 터전이다. 벽돌공으로 외국에 일하러 간 아버지 때문에 삼촌 집에 살면서, 가축을 돌보고 우유를 짜고 온갖 허드렛일로 채워진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브루노는 학교에도 가지 못한다.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규모가 큰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 그는 연중 딱 한 번뿐인 휴가를 여름 산에서 보낸다. 산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피에트로도 산에 오른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무슨 까닭에서인지 아버지를 멀리한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피에트로를 사랑하는 아버지, 조반니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도시와 일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산에 오를 때 비로소 그다워진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수많은 산의 정상을 정복한다.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있는 것처럼 조반니에게도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다. 그들 역시 산이 우정의 매개가 되어주었다. 젊은 시절 변변한 장비도 없이 단둘이 겨울 산을 등반하던 중, 피에로는 눈사태를 맞아 실종되고 만다. 피에로는 피에트로의 외삼촌이다. 피에로가 죽은 후 피에트로 외가의 반대 속에서 아버지 브루노는 어머니와 결혼했고, 이후 외가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조반니는 강해 보이지만 연약하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에서 병들어 갔다. 그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때는 산을 오를 때뿐이었다. 어린 아들 피에트로가 선뜻 산행에 따라오자 그는 행복했다. 다른 등반가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뿌듯했다. 부자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어려운 산행을 함께 이어가다가 갑자기 멈춘다. 사춘기 아들이 아버지의 어떤 기질을 밀어냈고, 이후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으며 남처럼 지낸다.

피에트로의 빈자리를 브루노가 대신한다. 그는 조반니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이 되어준다. 브루노는 조반니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언이 되어 버린 부탁을 실행에 옮긴다. 그레논 산 밑, 호수가 보이는 땅, 아름다우나 아무도 찾지 않는 땅, 반쯤 무너진 집이 있는 땅을 사 둔 아버지는 그 자리에 집을 짓고 싶어 했다.


피에트로는 브루노가 부러워할 만한 부모와 가정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를 닮아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피에트로에게 기대를 품고 자신과 같은 길을 가 주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그 분야에 관심이 없었던 피에트로는 일찌감치 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한다. 대학을 자퇴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도는 그를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피에트로는 네팔로 가서 산악인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나중에는 작가가 된다. 그 후에도 네팔을 이웃집처럼 수시로 오가며 히말라야에 오른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와의 산행을 거절한 이후 아버지와 절연하다시피 살았지만, 결국은 그도 산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른다.


아버지가 고속도로 갓길에서 깜빡이를 켜고 운전대에 손을 얹은  세상을 떠나고 한참 후에야 피에트로는 아버지의 지도를 펼치고 아버지가 등반했던 길을 하나하나 되짚어간다. 아버지는 지도 위에 직접 산행한 길을 따라 줄을 그어 놓았다. 세 가지 색깔의 사인펜으로. 아버지 혼자 떠난 산행과 피에트로 자신과 함께 했던 산행에 대한 기억을 꿰어 맞춰 보니 검은색은 아버지, 빨간색은 피에트로였다. 그런데 검은색 옆에 초록색 선이 나란히 그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은 브루노의 것이었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나란한 선보다 검은색과 초록색이 나란한 선이 지도에 더 빼곡했다. 자신이 아버지를 떠나 있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버지 옆을 지켰던 사람은 브루노였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가듯 아버지가 올랐던 등산로를 오르던 피에트로는 정상 곳곳에서 아버지의 메모를 발견한다. 어느새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된 피에트로는 뒤늦게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간다. 삶에서 시간은 자주 엇갈린다. 아버지와의 화해 가능성을 조심스레 짚어보던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뒤에서 힘겹게 따라오는 아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앞만 보고 산을 올랐던 때처럼.

아버지는 생전에 사놓은 땅에다가 집을 짓겠다고 브루노에게 말했다. 브루노는 이미 오래전 결심하고 계획한 듯 봄이 오자마자 산 위 허물어진 집이 있는 자리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한다. 피에트로도 그 작업에 동참한다. 브루노는 그 집이 피에트로의 집이라고 하면서,  땅의 옛 지명이 ‘바르마’라고 말해준다. 피에트로는 작가가 된 뒤에도 바르마 집과 네팔을 오간다.



한편 브루노는 삼촌에게서 방목장을 인수하고 피에트로의 옛 동료인 라라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산다. 라라와 함께 야심 차게 방목장을 운영하던 초반에는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정부의 규제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방목장 운영이 어려워지고 브루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일만 했던 브루노인데 생활고는 비켜 가지 않는다. 불공평하게도 세상일은 성실함만으로 되지 않는다.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서민은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사실 가축을 돌보고 기계가 아닌 손으로 소젖을 짜고 치즈를 만드는 일은 경험에서 빚어진 숙련된 기술과 지식을 요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브루노가 실패한 데는 외적인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브루노는 타고난 산(山) 사람이었지만 생활인으로는 모자랐다. 돈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그저 평생 묵묵히 몸에 익은 일을 해온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라나의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자연의 고독을 닮은 그에게 가장이라는 자리 또한 하나의 버거움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내 라라와의 불화를 낳았고 브루노는 혼자 남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산을 떠나지 않는다. 피에트로의 산속 집을 빌려 살던 브루노는 폭설이 내린 겨울 산에서 실종된다. 그것은 어쩌면 브루노가 원했던 방식이다.

피에트로가 들려준 티베트의 전통 장례 방식대로 브루노는 평생 함께했던 산, 삶의 터전이자 친구였던 산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육신까지 자연에 내어주며 끝내 산과 하나가 되었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빙하와 숲과 목초지와 호수로 이루어진 장엄한 산. 말이 없으나 평생 두 사람의 친구가 되어준 자연. 그리고 어린 시절 산에서 만나서, 한 사람이 산과 하나가 되어 돌아갈 때까지 서로의 삶의 향방을 지켜봤던 두 친구.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하는 자와, 수미산의 정상에 오른 자 중에 누가 더 큰 깨달음을 얻었을까? 네팔 노인이 피에트로에게 들려준 질문의 답은 질문보다 어렵지 않다. 끝까지 고향의 산을 지켰던 브루노는 수미산의 정상을 올랐으며, 평생 무언가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올랐던 피에트로와 아버지 조반니는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하는 자이지 않았을까. 수미산은 하나이듯 우정도 하나다. 하나의 우정에 이르기 위해 피에트로와 아버지는 정신없이 산을 올랐을까.

영화는 운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피에트로가 아버지와 불화하고 방황하던 끝에 원하던 작가가 된 후,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르던 어린 시절처럼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산을 반복해서 오른 일, 운명에 순응하며 평생 산을 벗어나지 않은 브루노가 생활인으로서는 불행을 만난 것, 그리고 두 친구가 열한 살 때 처음 만난 이후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를 이어간 것 모두 운명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봐 온 큰 산은 그들의 운명을 보듬어 안는 것 같다.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 30분 동안 몰입해서 감상했다. 어떤 대사나 내레이션은 시(詩) 같았다. 스크린 속 자연은 영적이었다. 영감을 주는 훌륭한 ‘작품’을 만났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는데, 다 보고 난 느낌은 더 큰 상도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영화제 티켓 예매가 시작되기 전, 영화제 책자를 정독하다가 마음이 가는 작품에 표시를 해 두는데, 이 영화에도 작게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다. 우선순위를 매겨놓은 대로 예매를 하다가 이 영화를 빼먹은 걸 알고 뒤늦게 들어가니 잔여석이 많이 있었다. 이미 매진된 작품이 많은 시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인기와 화제성이 없다는 거다. 줄거리만 훑어봐도 산이 주인공인 것 같고 두 남자의 우정을 그렸다 하니 사람들이 흥미를 잃은 거지 싶었다.

그런데 보기를 잘했다. 역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야 한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내 선택이니 괜찮고, 좋으면 두 배 세 배의 만족감을 주니까. 이 영화는 당연히 후자였다. 이런 좋은 작품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의아하고 안타까웠다. GV를 못 본 것도 아쉬웠다.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데. 원래 계획에는 GV가 있었는데 취소되었나 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동네 도서관에 가서 파울로 코녜티의 원작 소설을 대출해 왔다. 앞부분은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 자주 멈추게 되었지만, 뒤로 갈수록 문장은 탄력성 있게 잘 넘어갔다. 좋은 문장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에 메모장이 그득 찼다.  


    

나와 어머니, 우리는 똑같아. 단지 차이는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뿐이야. 내가 숲속에서 살겠다고 떠난다면 아무도 별말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여자가 그런다고 하면 사람들은 마녀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어? 나는 단지 말을 잘 하지 않는 남자가 될 뿐이지.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여자에게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게 틀림없어.
만약 우리 어머니가 남자였다면 그녀가 원하는 인생을 살았을 거야. 결혼해서 살 유형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와는. 그녀의 유일한 행운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거야.    

 


아버지는 나와 브루노에게, 빙하는 산이 우리를 위해 소중히 간직한, 지나간 겨울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넌 뭘 하려고 태어났어?
산사람이 되려고.     


너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고 나는 남아 있는 사람이야. 늘 그렇듯이. 그렇잖아?    
 

나를 데리고 내려가려고 30년 동안이나 시도하고 있는 거야? 내 걱정은 마. 이 산이 나를 해치려 든 적은 없으니까.
    

단지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아무 계획 없이…(중략) 이것이 바로 나와 브루노가 산을 타는 방식이었다.   
 
 
매번 산에 오를 때면 나 자신으로, 내가 있던 곳으로, 그리고 마음이 편한 곳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가장 높은 첫 번째 산에서 친구를 잃은 우리 같은 사람은, 단지 여덟 개의 산을 배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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