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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Oct 24. 2022

라이스 보이 슬립스 Riceboy Sleeps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 #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가 : 캐나다

감독 : 앤소니 심



한국계 캐나다인 앤소니 심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로, 이민자로서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야기이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만났다. 클래식한 방식으로 마음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 디지털이 아닌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화면도 이야기의 느낌을 잘 살렸다.

3년 만에 정상화된 올해 영화제에서 욕심내어 꽤 많은 편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있어서 내용 못지않게 만듦새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렇지 못한 몇몇 영화를 통해 알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폐부를 파고드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이야기는 뜨거운 진정성을 가지고 관객에게 다가간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설 때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내 눈가도 뜨거워졌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소영(최승윤)이 일곱 살 난 아들 동현(도현 노엘 황)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9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며, 시간 순서에 따라 현재 시점까지 평면적으로 이어진다. 과거 회상 장면은 딱 하나, 소영이 사랑했던 사람, 동현의 아버지가 죽는 장면뿐이다. 내가 살아온 시대와 겹쳤고 누군가는 신파라고 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영화제의 주요 관객인 2, 30대들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했는데, 앞뒤 옆 좌석에서 훌쩍이는 젊은 관객들을 보면서 진정성 있는 이야기는 형식이 조금 덜 세련되어도 세대를 관통해 같은 감동에 이르게 하는구나, 생각했다.    



 

여주인공 소영은 강인하다. 삶의 조건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고 성인이 되면서 자기 몫의 삶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1960년생 여자. 사랑했던 남자가 조현증으로 입원 중에 자살하고, 미처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던 여자는 졸지에 홀로 사생아를 키우는 미혼모가 되었다. 그 시절 ‘사생아’라는 말은 불온하고 위험한 말이었으며 울타리 밖으로 내쳐진 존재를 의미했다. 1970~80년대에 쓰이기 시작한 ‘미혼모’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영은 용감하게도, 그게 아니면 그 길밖에 없어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소영에게는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 있었기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인종차별에 기죽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에게 한국의 전통 이야기를 읽어 주었고,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집에서는 한국말을 썼으며, 식탁 위엔 매 끼니 정성을 들인 고국의 음식들이 놓였다.

그녀는 낯선 땅에서 아들 동현과 살아남기 위해 억척스러운 엄마가 되어야 했다. 한편 동현의 결핍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 구멍으로 찬바람이 드나들었다. 어느새 사춘기가 된 동현(이든 황)은 묵은 상처가 폭발하기 직전이다. 일곱 살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작된 놀림과 차별(반 아이들은 동현의 김밥 도시락을 보고 냄새난다고 코를 감싸 쥐면서 동현을 ‘라이스 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은 중학교에 가서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아 오라는 과제를 받은 동현은 저녁 식탁에서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소영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는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사랑했던 동현 아빠에 대한 기억조차도 지우고 싶기 때문이다.



소영은 직장에서 자기와 같은 이민자인 한국인 동료를 만나고, 오래 근속하는 동안 인종을 불문하고 다른 동료 직원들과도 우정을 쌓는다. 남편도, 부모 형제도, 친척도 없어 옆구리로 찬바람이 수백, 수천 번 지나갔을 소영은 새롭게 이주한 나라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게다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한국인 입양아 사이먼에게서 청혼까지 받는다. 그대로만 간다면 이 서사는 고난 끝에 행복으로 안착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상투적인 클리셰인데, 그녀는 췌장암 4기에다가 이미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됐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다. 의사가 불러주는 어려운 단어의 알파벳을 받아 적고 영한사전을 뒤적거리는 그녀에게 암 선고는 남의 일 같고 생경한 영어 철자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온다.

    

장면은 얼마 안 가 우리에게 익숙한 배경으로 바뀐다. 마음이 편해진 이유가 눈에 익은 장소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화면 비율이 바뀌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1.33:1의 아날로그적 화면에 담은 캐나다에서의 장면과 달리, 한국에서의 장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비율로 확장해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GV에서 들은 내용에 따르면, 앤소니 심 감독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좋아해서 일부러 그 영화와 같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여 <박하사탕>의 질감을 구현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 나왔다.    

 

강원도 심심산골 어디쯤으로 보이는 곳, 멀리 첩첩한 청색의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련하다. 산등성이를 흐르는 곡선이 관객의 마음 또한 어루만진다.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소영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동현에게 말했을 때 동현은 집을 나가 친구들과 다소 방탕하게 어울리며 자신과 엄마를 파괴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소영은 동현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여행지는 바로 이곳,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이다.


두 사람이 찾아든 곳은 오래된 시골집이다. 이곳에서 동현의 오랜 외로움과 독기가 얼음 녹듯이 서서히 풀린다. 자기의 뿌리를 알게 되어 비로소 안심되는 마음이다. 흡족함이다.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따뜻한 환대 속, 둘러앉은 밥상에서 동현은 그때까지 먹어본 밥 중에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다. 그 밥이 할아버지가 직접 농사지은 쌀로 지은 것임을 알고 표정이 환해지는 동현. 어릴 때 동현을 ‘라이스 보이’라 부르며 놀렸던 아이들 앞에서 밥은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할아버지가 몸소 땀 흘려 농사지은, 자부심 가득한 쌀로 지은 밥이 동현은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어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파란색 렌즈를 꼈던 동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엄마에게 반항했던 동현. 엄마에게는 자신밖에 없으며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악하듯 밀어내는 마음의 기저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어릴 때 떠나온 한국에 대해서도 한사코 함구해 왔으니까.

작은아버지는 동현을 이발소에 데려간다. 동현은 노란 머리를 자른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잃어버린 렌즈 대신 안경을 쓴다. 이제 그는 자기가 가진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목욕탕 씬에서 한국적인 원체험 같은 장면들이 나온다. 생전 처음 가 본 공중목욕탕에서 작은아버지와 서로 등을 밀어주며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거나, 탕 안에서 물장난 치는 거나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동현은 싫지 않은 눈치다. 확실한 것은, 캐나다에 있을 때보다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는 사실이다. 생부의 묘를 찾아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데서 그의 뿌리 찾기는 마무리된다.

이제 소영은 동현을 껴안으며 말한다. 

"집으로 가자."     



여자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이어서일까. 외로움과 고난의 서사가 주는 원초적 감동 때문일까. 나는 초반부터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울컥했던 장면이 있다. 소영이 암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이먼이 소영에게 다가앉으며, 자기는 항상 소영 곁에 있을 것이며 너는 이겨낼 수 있다고, 동현은 자기가 돌볼 거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을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알맹이가 없는 말을 많이 하고 산다. 표현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동안 의례적이고 틀에 박힌 표현들에 둘러싸여 있었나 보다. 말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건 이런 거구나. 가슴 한가운데가 찌르르 울리면서 통증이 느껴졌다.     


소영이 암 판정을 받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까지 동현 앞에서 아버지와 친가 가족을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슬픈 것이지만 죽음 앞에서 생의 고갱이를 마주하기도 한다.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영은 죽음 앞에서야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린다. 그것은 누구보다 동현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소영이 한국을 떠난 이래 줄곧 회피해 왔던 것. 살기 바빠서, 아이를 보호하고자 눈에 힘주고 살았는데 죽음 앞에 서고 보니 비로소 돌아가야 할 곳이 보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자 아이 아빠를 잃었지만, 강원도에 살고 있던 동현의 친가 사람들은 자식을, 형제를 잃었다. 그들 역시 소영에게까지 눈 돌릴 여유가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걸 무디게 만든다. 세월이 흘러 의젓하게 성장한 동현을 그들은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그가 아기일 때부터 알았던 사람들처럼 동현을 대한다. 늦었지만 소영에게도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위로와 사과의 말을 건넨다. 다만 아들을 잃은 충격 탓에 마음이 병든 동현 할머니는 소영 모자에게 괴팍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사실 그게 더 현실감을 주었다.

그들,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 앞에서 동현은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캐나다의 친구들 앞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다. 비로소 그 나이의 아이다워서 안심되는 웃음. 동현은 허름한 시골집에서, 공중목욕탕에서, 생부의 무덤 앞에서 그를 얽매고 있었던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푼다. 허공에서 부유하던 그가 내려앉을 땅과 뿌리를 찾은 것이다.     


사이먼 역은 앤소니 심 감독이 맡았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외모가 배우 뺨친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고전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영화 속 동훈과 같이 일곱 살에 이민을 가서 우리가 모르는 힘든 시간을 지나 이제 캐나다인으로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를 보면서, 그도 동현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겠구나, 생각했다. 그 역시 뿌리에 관심이 많아서 영화를 찍기 전부터 한국의 전통 회화나 도자기의 이미지에서 정서적인 것들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영화를 제2의 ‘미나리’라고 한다는데 단언컨대 나는 ‘미나리’보다 이 영화가 더 좋았다. 감독은 ‘미나리’와 자신의 영화를 비교하는 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이민자의 삶을 소재로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했다. 이 영화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모성에 대한 담론이 많지만, 어머니와 관련된 서사는 항상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1960년생인 소영은 ‘옛날 사람’이다. 요즘 엄마들처럼 정보가 많아 육아법에 통달하지도 못하고 의식화되지도 않았다. 학교에 안 가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학교로 밀어 넣는 소영에게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 같은 건 없다. 사춘기에 도달한 아들의 결핍과 상처는 바로 자신의 것과 닿아 있기에 모른 척한다. 그것이 아이에게 더 나은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땅은 그녀를 환대해 주지 않았다.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나쁜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에게 남은 건 사생아를 키우는 미혼모라는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뿐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 땅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여린 뿌리라도 내려야만 했다. 새로운 땅은 아들 동현에게도 튼튼한 뿌리를 내릴 터전이 되어 줄 것이었다.

동현에게 원래의 토양과 뿌리를 확인시켜 주고 소영은 이제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소영을 연기한 최승연 배우가 말한 대로 거기서 집이란 현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소영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혼자 남은 동현을 가족처럼 사랑해 줄 사람들이 있는 곳. 동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뿌리에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어렵사리 또 하나의 뿌리를 내린 캐나다에서 살아갈 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멀리 자신이 태어난 한국 땅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가족의 개념이 재정의되고 모성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담론이 지배적인 요즘, 어떻게 보면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종류의 서사가 예기치 않은 감동을 주었다. 이런 뜻밖의 감정이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감동에 푹 젖어있는 쪽을 택하고 싶다.  

   

소영이 이민을 떠난 1990년대 초로부터 불과 30년이 흐르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이 변했다. 계층 간, 세대 간, 성별 간 갈등도 심해졌다. 정치인들이 갈등을 부추기고 권력 유지의 도구로 삼은 탓이 크지만, 사회가 각박해지기도 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시기는 어쩌면 지금보다 단순했다. 90년대는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나 문화가 호황을 이뤘던 시기이다. IMF가 오기 전까지는.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열심히 살면 대체로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때 소영이 이민을 떠날 수 있었던 용기도 그런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이 보이지는 않는다. 소영이 돌아온 곳이 도시가 아니라 강원도여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면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30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산의 둥근 능선처럼 포근하게 두 사람을 감싸 주었다. 긴 세월 마음속에 고여 있던 아픔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소영은 두 번째로 용기를 내어 자신이 태어난 땅을 밟았고, 이제 또 다른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삶의 근거지로 돌아가려고 한다.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는 소영에게 이제 더 이상 회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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