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하루

by 들국화

○○야.

등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공기에 실려 날아왔다. 운동을 끝내고 주차 타워에서 차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설마 내 이름인가?


이 나이에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릴 일은 잘 없다. 직장에서 만난 나의 절친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인가, 타인의 입에서 발화되어 나오는 나의 이름을 듣는 일은 조금 설레기까지 한다. 아이 때로 돌아간 기분도 든다.

돌아보니 역시 K 언니다. ‘역시’라고 한 건, 그녀가 전에도 한번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있어서이다. 오늘과 똑같이 스스럼없는 어조로. 처음 그 세 음절의 소리를 들었을 때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순간 점프한 듯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K 언니와는 퇴직 후 오전 수영 강습에서 만났다. 그녀는 한눈에 확신의 파워 E 상이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 그녀의 남다른 친화력은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녀 주변으로 늘 왁자한 웃음소리가 일어나 퍼져나갔다. 그녀는 또한 타고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수영 강습과 저녁 요가 강습에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나를 포함해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떤 이는 애정 어린 충고를 하기도 했다. "언니 나이에는 운동을 너무 무리해서 하는 것도 몸에 안 좋아요." 누가 뭐라고 하든 언니는 임플란트 치료를 받는 기간을 빼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 시간에 출석했다.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그녀가 딱 한 번 코로나에 걸려서 안 보인 적이 있는데, 코로나조차 별 증상 없이 약하게 지나갔다고 했다.


수영에 한참 재미를 들였다가 1년 내내 감기가 끊기지 않는 바람에 발길을 끊었다. 대신 오전에 줌바 댄스와 요가 수업을 연달아 수강하게 되었다. 자연히 그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주말에 목욕하러 왔다가 마주치면 환한 얼굴로 서로를 반가워했다. 사람 사이에도 파동이 있다면, 우리는 정반대의 성격인데도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했다.



○○야, 하고 K 언니가 불렀다. 다정함이 듬뿍 실린 목소리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연한 아이보리 색 바바리코트 위에 색색깔의 고운 문양이 어우러진 스카프를 멋스럽게 둘렀다. 70대 중반의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예쁘다고 감탄한다. 그녀는 운동 시설을 걸어서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중요한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예쁘게 꾸미고 온다. 그녀는 자신을 꾸밀 줄 안다. 어떻게 치장해야 자신에게 잘 어울릴지를 안다. 여름에는 짧은 소매 티셔츠, 봄가을엔 긴 소매 티셔츠, 겨울엔 그 위에 외투를 걸치며, 1년 내내 청바지 차림의, 자신을 꾸미는 데 게으른 나와는 다르다.


나는 먹고 있던 견과류 봉지를 열어 견과 몇 알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니, 그동안 통 안 보이데? 운동 나오고 있었나?

네. 저 요즘 줌바랑 요가 하잖아요. 언니 수영이랑 시간대가 겹치니 못 만난 거죠.

그랬나?

나는 그녀의 손을 한번 쥐었다 놓았다. 나도 그녀에게 다정함을 건네주고 싶었다.

잘 지내셨죠? 예뻐요, 언니.

고마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미소에서 얼핏 소녀의 수줍음을 본 것도 같았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오래 남았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마음을 나누기에는 충분했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서로를 향한 다정함이 아닐까.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건 상대에게 웃음을 짓는 것,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 최민석 <베를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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