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배웅하던 날
엄마가 떠난 날은 하늘이 높고 파랬고, 햇빛은 신선했다. 기록적인 더위로 지쳤던 긴 여름이 뒷등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살아생전 자식들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던 엄마는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남겨진 자식과 손주를 배려한 게 분명했다.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있던 아들은 할머니의 치밀한 계산 덕에 장례식이 끝나고도 하루를 더 쉬고 출국할 수 있었다. 나의 절친은 해외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에 부고 전화를 받고 내 곁을 충분히 지켜줄 수 있었다.
엄마는 편안한 잠에 들듯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고요히 두 눈을 감으셨다. 엄마가 영면하기 전, 동생과 내가 번갈아 가며 ‘좋은 말들’을 엄마의 귓가에 대고 들려줬다. 자지러지는 통곡 소리는 없었다. 조용한 훌쩍임만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가 사그라들었다.
엄마의 거친 호흡 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편안하고 느린 호흡으로 바뀌었다. 동생이 말했다.
“엄마 소원이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곳으로 가시네.”
침대 발치에 선 오빠가 말했다.
“이제 환한 빛이 보일 겁니다.”
그 말이 아니어도 나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가 고통이 더 많았던 이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밝고 환한 곳으로 가셨다는 것을. 침대 위 모니터에 나타나는 숫자들의 변화를 지켜보던 당직의는 손목의 맥을 짚고 안구를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엄마의 영면을 선언했다. 오후 1시 23분이었다. 엄마의 얼굴 피부에서 빛이 났다.
그로부터 몇 달 전 엄마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엄마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 환한 미소를 띤 얼굴에서는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살이 적당히 오른 몸은 보기 좋았고 자세는 꼿꼿했다. 오래 병원 침상에 누워 있어서 굳고 뻣뻣해진 몸이 아니었다. 엄마는 내 앞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이기도 했는데 춤을 추듯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생 붙잡혀 있었던 불안과 걱정에서 해방된 엄마는 낯설었지만, 보는 나까지 기분 좋게 만들었다.
꿈은 반대라니까 그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속에 어떤 믿음이 자리 잡았다. 꿈에서 본 것처럼 엄마가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통 없는 곳으로 가실 거라는 믿음이.
마침 가까운 성당 장례식장에 한 자리가 비었다고 했다. 요양병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성당이었다. 엄마는 혼자 사실 때 일요일마다 그 성당 버스를 타고 미사에 참석했다. 병원에서 나와 걸어가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투명하게 파랬다. 사방이 고요했고 초가을 햇빛이 온화하게 우리 일행을 감쌌다.
신부님은 장례미사 강론에서 말씀하셨다.
“자녀분들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최근의 아프셨던 모습으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자녀분들이 모르는 젊은 시절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던 어린 엄마, 꿈이 있었던 젊은 날의 엄마.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엄마의 인생이 떠나가고 있었다. 날개를 펴고 훨훨. 엄마는 자유를 얻었다.
잡풀 사이를 헤치고 도착한 묘역에는 인부들이 미리 와서 사전 작업을 해놓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골함 위로 가족들이 차례로 흙을 끼얹었다. 잔디 떼를 입히는 작업은 금방 끝났다. 바로 옆 아버지의 무덤까지 새 단장을 마쳐서 초가을 햇빛을 받은 두 기의 무덤은 따듯하고 아늑해 보였다.
장례식장을 출발할 무렵 비를 뿌리고 흐렸던 하늘은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동안 점점 맑아지더니 산소에 도착해서는 직사로 내리쬐는 강한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게 했다. 어느 해 봄 아버지 산소에 올 때 엄마가 단풍나무 묘목을 가져와 무덤 옆 한편에 심었다. 그때 아기였던 나무가 지금은 키가 훌쩍 자란 청년이 되었고 나뭇잎도 제법 무성해졌다. 우리는 그 단풍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안에 깃들어 앉아 미리 주문해서 받아온 도시락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인부 중의 한 분이 남은 생수로 비석을 씻었고, 또 한 분은 분향소에서 가져간 흰 국화 여러 송이를 엄마 무덤 앞에 심어 주었다. 국화꽃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맞을 것이다. 엄마는 꽃향기와 함께 남겨졌다. 내려가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봤다. 봉분이 햇빛을 받아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