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패키지여행기 3

3일차 여정

by 들국화

수면 시간은 부족해도 고된 일정 탓에 잠은 계속 잘 잔다. 아침마다 우리집인 줄 알고 깨어난다. 그래도 시차 적응이 다 된 건 아니어서 어느 시점이 되면 졸음이 쏟아진다.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새벽부터 서둘렀다. 도시락이 든 봉지를 하나씩 받아들고 시내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 산악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석회암 성분 때문에 밝은 회색빛을 띤 빙하수가 꿈틀거리며 질주해 내려왔다. 수량이 많다는건 녹아내린 빙하의 양이 많다는 거겠지. 그건 지구온난화와 연결되겠지.

산간 지역인 그곳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고 잘라서 쟁여놓은 나무 땔감이, 농기구 창고가 보였다. 구릉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들도 보였다. 스쳐 가는 우리에겐 관광지이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매일의 생활 터전일 뿐이다.


산악열차에서 내려 아이거 익스프레스라는 26인승 곤돌라를 타고 융프라우로 올라갔다. 곤돌라는 열차보다 소요 시간을 줄이면서 좀 더 생생한 풍경을 볼 수 있게 했다. 2019년에 완공됐는데 코로나 이후에야 활발히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초원과 설산이 함께 있는 자연 풍경이 눈을 씻어 주었다.


곤돌라에서 내려 다시 암반을 뚫어 만든 철길을 달리는 열차를 타고 해발 3454m의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우리 말고도 몇 개의 여행사 깃발을 따라 엘리베이터 앞이든 통로든 전망대든 한국 관광객으로 들어찼다. 사방에서 한국말이 들려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렸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왠지 피곤해진다. 한국인 특유의 바이브랄까 그런 게 있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겠고, 융프라우 관광 수입의 상당 부분을 한국인 관광객이 책임져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뭔가 꽉 짜여진 관광 프로그램은 별 감흥이 없다. 일률적으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 줄을 서서 똑같은 걸 보는 관광.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어, 오르기 힘든 고산을 뚫고 산악열차를 완공한 때가 1912년이라고 한다. 고산 관광을 용이하게 만들어놓은 그때부터 시작하여 이후 체계적으로 짜놓은 프로그램 속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해발 3751m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거나 하면 외부로 나가는 출입문을 닫아서 만년설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되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경량 패딩과 얇은 스카프만 준비해갔는데 밖으로 나가니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바람도 없기는 했지만 머리 위에 와닿는 강렬한 태양의 온기 때문이었다. 태양의 소중함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암벽을 뚫어 만든 통로를 지날 때 으슬으슬한 한기가 몸을 감쌌다.


인터라켄으로 되돌아와 한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동안 한식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는데도 김치, 깍두기, 양파장아찌를 먹는 순간 입과 위장이 환호했다. 먹고 나니 속이 편했다. 역시 나는 한국인이구나, 생각했다. 인터라켄 거리에서 1시간 자유시간을 가진 후 밀라노로 이동했다.


융프라우 여행은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개발된 관광 코스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온 기분을 안겨 주었다. 풍광이 아무리 빼어나도 스스로 선택하고 체험하지 않는 여행은 내 안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