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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화 Apr 24. 2020

알파고와 코로나19가 바꾼 일상

인간만의 가치, 주체성과 창의성


많은 분들에게 미디어 교육에 대해 말씀드리면 돌아오는 답변 중 하나가 ‘편하게 쉬려고 미디어를 접하는데, 왜 그 순간마저 피곤하게 생각을 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가로서의 미디어 생활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한정 짓기에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는 미디어를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거창하게 접근해보면 인문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자주 거론되면서 지속적으로 일자리가 없어질 거란 걱정 섞인 예측이 많이 나왔습니다. 패턴화가 가능한 업무는 대부분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인간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2020년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가게에서 수많은 아르바이트가 키오스크로 대체되었습니다. 나아가 어르신들이 주문하기 힘든 키오스크로 인해 디지털 소외 문제도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 ‘키오스크’가 비인간적이라고 비판받던 분위기가 전환되어 수용자들에게 ‘키오스크 이용법을 교육하자’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했고 그 영향력은 전 영역에 미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이름으로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사람끼리 접촉하지 않는 ‘언택트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최대한 집에서 생활하며, 친목 모임은 SNS로 대신하고, 많은 물건은 온라인 상점에서 주문했습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영화와 드라마 등을 시청했고, 방송에서도 ‘몰아보기’, ‘정주행’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기획하여 중계하였습니다. 방 안에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방구석 콘서트’, ‘안방 공연’, ‘온라인 상영회’ 등의 프로그램도 구성되었습니다. 서점도 조심스럽고, 도서관도 휴관하자 전자책을 구매하는 분들도 늘었으며, 발맞추어 전자책 스트리밍 서비스도 이벤트를 실시하며 세력을 확장해나갔습니다.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를 하며 화상회의를 진행하고, 학교들은 온라인 강의로 학교 수업을 대체하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되면서, 그 자리를 연결해주는 것들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미디어가 해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급속도로 변했고,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미디어 자체가 인간들의 직접 소통을 막는, 비인간적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미디어를 어떻게 인간적으로 대할 것인가를 좀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간답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세상의 변화, 특히 산업의 변화와 함께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알면 시대에 맞는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쓰는 욕은 동물과 관련된 것이 많았습니다. ‘개’로 시작되는 다양한 어휘를 포함해서, ‘짐승만도 못한 놈’, ‘닭대가리’, ‘돼지 같다’ 등, 동물과 연관된 욕설은 국가와 언어를 불문하고 수없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려고 애써왔으며, 동물과 같아지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동물을 부리는 입장에 선 만큼 인간의 우월성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생물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동물도 인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감정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도 하고, 정을 붙이거나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근거로 가져오는 것이 인간은 욕망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이런 맥락이죠. 


인본주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욕구위계 5단계론’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보다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되는 욕구를 생리적(본능적)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 자아 실현의 욕구 5단계로 나눴습니다. 높은 단계로 갈수록 고차원적인 욕구를 나타냅니다. 동물이 아래쪽 단계에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하다면 인간은 동물이 다다를 수 없는 사회적이고 주체적인 욕구를 통해 인간만의 보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동물과의 다른 점을 통해 ‘인간다움’을 증명해왔습니다. 또한 동물이 다다를 수 없는 고도의 사고능력을 ‘이성’이라고 칭하며 인간만의 합리성, 논리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새로운 비속어(?)가 등장했습니다. “로봇 같다”, “영혼이 없다”, “냉혈한이다”, 

“공감능력이 없다”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봇bot이란 로봇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터넷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대략적으로 통칭하는 말입니다. 웹사이트의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관리하는 프로그램, SNS에서 프로그램된 패턴대로 정해진 답변을 출력하는 계정,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게임에서 사람 대신 플레이를 하는 인공지능 등 다양한 봇이 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는 꽉 막힌 사람, 남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할 때 이런 말이 쓰입니다. ‘로봇’이 가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이미지 대신, 정해진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획일성,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가움을 두고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대신 비록 실수를 저지르거나 비효율적인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성과 창의성,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따뜻한 공감 능력 등을 ‘인간미’로 규정하여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기술이 발달하여 로봇의 성능이 업그레이드된다면, 이러한 말의 의미조차 바뀔 수도 있겠죠.            


인간에 대한 인식이 교육을 바꾼다     


우리가 가진 인간상에 대한 변화는 이번 4차산업혁명 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산업의 변화는 사람의 인식의 변화를 함께 가져옵니다. 정부가 교육과정을 통해 기르고자 하는 인재상을 보면 그 시대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의무교육으로 교육과정이 통일된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굵직굵직한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차 교육과정기(1955~1963)는 경험 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진보주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학생의 생활과 경험, 흥미를 중심으로 합니다. 기존의 식민 정신에서 탈피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주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70년대에는 교육의 중심이 학문으로 옮겨갔습니다. 다양한 개념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였고 국가의 이념을 주입하려고 애썼습니다. 지적, 이념적 표준에 맞춘 산업 현장에서의 일꾼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 중심 교육과정이 정립되어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교육을 시작합니다. 21세기, 세계화, 정보화에 발맞출 시민성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후 잦은 변화를 거쳐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발표되었습니다. ‘창의 ·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이라는 슬로건 아래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여 전 영역에 대한 기초 소양을 갖추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 나누어져 있던 문과와 이과의 통합에 대한 혼란과 우려가 뒤따르지만, 미래의 인재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육이란 것이 쉽게 달라지지 않아서, 교과서 조금 바뀌고 수업 방법이 조금 바뀐다고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의 변화는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지금 눈앞에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중요하고 수능과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것은 알지만 궁극적으로 그 배움이 효용을 발휘하는 것은 사회입니다. 사회의 필요를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시대는 창의적이고 융합 능력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하고, 교육은 그런 사람을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이 노력은 학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나와 평생교육을 통해,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결국은 주체성과 창의성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가진 존엄성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철학자들이 존엄성의 근원 중 하나로 ‘대체 불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할 내용이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엄마가 친정에 며칠 갔다 올 일이 있었는데, 살림이라곤 할 줄 모르는 남편과 두 아들이 걱정되어서 이것저것 교육을 잔뜩 하고 떠났습니다. 세 남자는 한동안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었다가, 엄마가 올 시점에 맞추어 교육받은 대로 말끔하게 해놓았죠. 당연히 엄마가 그 모습을 보면 좋아하고 칭찬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엄마는 오히려 토라집니다. 그동안 엄마가 집에서 해온 역할, 그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은 직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사수를 열심히 가르치면서, “네가 빨리 배워야 내가 편해진다.”라고 하지만, 부사수가 금방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마음이 싱숭생숭해질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내가 그만둔 후에 업무적 타격 없이 매끄럽게 운영된다면, 이미 떠난 회사라도 섭섭해지겠죠. ‘나란 존재가 이렇게 쉽게 대체가 가능한 것인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복제인간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옹고집전》을 떠올릴 것입니다. 원본과 차이가 없는 복제인간은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모두 학습한다면, 아니 뛰어넘는다면 인간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고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이런 대체 불가능성, 혹은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뿐 아니라 우리의 미디어 생활에도 오래전부터 들어와 있습니다. 미디어가 인간의 상상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죠.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아이, 로봇> 등의 작품에서 인간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가상의 적’들이 어떤 형태든 간에 시작은 우리의 손이라는 것이에요. 인간이 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우리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 그들만의 세력을 구성할 때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이죠.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지켜낼 ‘대체 불가능성'으로 주체성과 창의성이 먼저 꼽히는 이유입니다.


이제 특정 천재 몇 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체성과 창의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구현해내는 것이 비범한 능력이기보다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미’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미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 자체를 뒤엎으며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데이터로 무장한 미래 인류에게 현재의 ‘인간다움’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는 또다른 세상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무기는 주체성과 창의성입니다.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에서 ‘인간의 의미 찾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출처: <미디어 읽고 쓰기> 이승화 /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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