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저빌리티: 실행 가능한 일을 하라

일잘러의 어휘력

by 이승화
실현되면 안 되는 기획안


드라마 <미생>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직원들이 고생해서 기획서를 작성하고 상부에 올리는데, 기획서가 채택될까봐 불안해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힘들게 만든 기획안이 실제 사업으로 이루어지면 좋을텐데,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차가 쌓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겠더라고요.

우선 본인 기획서의 허점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겁니다.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했지만, 큰 리스크가 있거나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실행하기 힘든 프로젝트인 겁니다. 그 다음은 책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나의 기획서가 통과되면 기획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 올텐데, 부담스럽겠죠. 잘 안 풀리면 공격받을 수도 있고요.


반복적으로 기획서를 쓰면서 하루하루 버티는 직장 생활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기획을 하고 그 실행가능성을 체크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요. 실행이 되어야 성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학생 때 하던 아이디어 경진대회와는 다릅니다. 피저빌리티가 중요해요.

그래서 가능해?


피저빌리티(feasibility)는 ‘Feasible(할 수 있는)’과 ‘ability(능력)’가 결합한 단어로 ‘타당성, 실행 가능성, 적용 가능성’을 뜻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구현될 수 있는지 평가하고, 새로운 법안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지 점검하고, 시장의 반응이 어떠할지 확인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비즈니스 상황에서도 기간, 예산, 인력 등을 고려하였을 때 해당 업무가 실현 가능한 정도를 의미해요. 피저빌리티가 높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진행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피저빌리티가 낮다는 것은 예산이나 기간 문제 등으로 진행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프로젝트 단위가 커질수록 장애물이 많아지기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부터 실현 가능한 정도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위험 요소를 뜻하는 리스크(risk)의 여부는 실행 가능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어요. 리스크가 클수록 실현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꼭 예상되는 리스크를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제안주신 금액 토대로 피저빌리티 체크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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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작은 광고대행사부터 시작해 지금은 대기업의 마케터가 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직원이 5명인 작은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푸른 꿈을 안고 멋있는 광고를 만들고 싶었는데, 규모가 작으니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유명한 연예인을 섭외하거나, 인플루언서와 협업하거나, 여러 곳에 협찬하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모두 큰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마케팅은 결국 돈이라며 한탄했어요.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작은 잡지 광고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일을 맡아서 진행했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한다는 말처럼, 대체 자원을 열심히 구했습니다. SNS 마케팅도 유명한 인플루언서와는 진행할 수 없으니, 막 부상하고 있는 성실한 크리에이터를 찾아 협업을 하고요, 제휴 마케팅도 큰 플랫폼에 입점할 수 없으면 작은 플랫폼부터 들어가 인지도를 쌓는 방법으로 접근했어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와 협업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는 내부 직원을 꼬득여 개성 있는 디자인을 완성했어요. 그렇게 현재에 충실한 기획으로 차근차근 일을 해내며 대기업 인하우스 마케터가 되었습니다.


대기업은 예산이 많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제한사항이 많았습니다. 어디서든 똑같이 불만을 표출합니다. 누구나 ‘손흥민, 김연아, BTS’와 같은 슈퍼스타를 광고 모델로 쓰고 싶지만 힘들죠. 많은 예산을 쓰려면 그만큼 수익성이 담보되어야 하니, 수많은 제약 요소가 따라왔어요. 역시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실현 가능한 일을 하라


저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주어진 예산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직접 연구개발을 하다가 좀더 규모가 큰 회사의 신사업기획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구경하지 못했던 예산이 주어졌고, 이 예산으로 새로운 것을 실컷 만들어낼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답답했어요.


기획했다가 엎어지고, 기획했다가 엎어지고의 반복이었습니다. 실제로 매너리즘에 빠진 동료들 중에는 일을 하는 척에 매몰된 경우도 있었어요. 어차피 월급은 나오니까, 기획서 작성이라는 업무에 몰입하는 겁니다. 어차피 실현되지 않을 일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말이죠.


기획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화된 결과물을 만드는 입장에 익숙했던 저는 이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고 싶어 노력했어요. 하지만 경제 상황도 좋지 않고, 주어진 예산과 일정, 인력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이상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이 결과물이 있어야 사람들의 반응도 볼 수 있고, 당당한 포트폴리오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때의 고민은 피보팅을 거쳐서 다른 영역에 접목되어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게 되었고 지금도 강의 소재로 사용해요.


예산 문제, 인력 문제, 시장 문제 등 실행을 막는 다양한 제약 요소가 존재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몇 년 사이에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그때의 제한 사항들이 쉽게 해결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때는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던 작업들, 구현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한 기능들이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로 어렵지 않게 구현되는 세상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점점 밝아지고 있어요. 항상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을 떠올리고 만들어 나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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