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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진땀

11

오늘은 K그룹의 최종 면접날.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나도 어엿한 사회인이 될 것이다.

동갑내기 사회 선배들의 자존감 공격, 최종 불합격하는 날마다 씁쓸하게 삼켜온 소주, 수백, 수천 번을 썼다 지웠던 무수한 자기소개서들도 이젠 안녕이다.

그런데, 약 15분 전부터 배꼽 아래, 좌측면에서부터 묘한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마치 산모가 느끼는 태동처럼 단발적인 움직임이 산발적으로 반복된다. 경력 30년의 대변인(大便人)인, 이런 경험이 너무도 익숙한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 곧 무언가가 나올 예정이구나.‘     


설사의 장내 이동 속도는 시속 70km라고 한다. 그 정도면 100cc 스쿠터의 최고 속력보다 빠르고 경주마보다는 살짝 느린 속도다. 나는 창자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진혼곡을 애써 무시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을 돌렸다.

내 창자를 누비는 설사처럼, 출근 행렬을 가득 실은 지하철은 다음 정차역을 향해 쾌속 질주 중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환승역이다. 여기서 내리면 배차가 꼬여서 늦을지도 모른다. 꾹 참고 환승역에서 싸자.‘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인파 사이로 어렵게 팔을 뻗어 손잡이를 쥔 손에 땀방울이 맺혔다.

고인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새로운 땀이 뿜어 나왔다. 땀은 손바닥에서만 나지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벨트를 두른 허리로 자연히 흡수되는 불쾌한 액체, 그것은 진땀이었다.          

온 신경을 엉덩이 주위에만 집중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쳤다.

꽤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항문의 장력이 느슨해질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엉덩이골에 긴장을 주어 뱃속 가득 뜨거운 것들을 꽁꽁 동여맨 채, 내게 인기척을 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혹시 지성대학교 김정훈 맞아요?"

나는 손잡이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상대방의 얼굴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지수였다.

대학 시절 한 학번 선배이자, 우리 과에서 가장 예쁜 얼굴로 학생부터 교수까지 호감을 안 가진 사람이 없었던 최고의 퀸카, 최지수. 지방대에서 자퇴하고 반수 해서 서울에 입성한 내게, 지수는 그야말로 천사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자 존재 이유인 법. 나는 첫눈에 지수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 같은 숙맥이 품기에 지수는 너무 큰 존재였다. 지수는 후배, 동기, 선배, 졸업생, 그리고 교수님까지 남과 노, 소를 안 가리고 모든 남성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난 국가가 지정한 여러 고백 이벤트(빼빼로데이, 화이트데이, 성탄절 등) 때마다 등 뒤에 지수를 닮은 꽃다발을 감추며 내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지수가 거느린 호위무사들의 방패는 너무나 두터웠다.

그렇게 나는 지수와 단둘이 말 한마디도 해본 적 없이 졸업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문으로 지수는 A사의 스튜어디스로 취업했다던데, 오랜만에 보니 정말 그 직업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시원시원하게 쭉 뻗은 팔과 다리, 그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앙증맞은 얼굴, 그것을 여백 없이 가득 채운 이목구비. 그리고 모든 것을 무장 해제시킬 만큼 아름다운 미소.

날 설레게 한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더 예뻐진 것 같다.     

지수야, 난 널 정말 좋아했어.

그런데, 왜 하필 내가 가장 나약한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거니.          


나는 허리를 꼿꼿이 피고 항문을 단단히 조인 채 그녀에게 인사했다.

“자, 잘 지내지?”

배에 힘을 주지 못하니 목소리가 염소처럼 가늘게 떨렸다.

“응, 잘 지내지! 진짜 오랜만이다 너.”

지수는 나와 같은 환승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 둘만의 오붓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약 10년 전부터 그토록 꿈꿔온 순간이다. 덕분에 뱃속에서 요동치던 파도는 잠깐 고요함을 찾았다.

“너 요즘 운동하니? 대학생 때는 비리비리했던 것 같은데. 이젠 덩치가 듬직해진 것 같아. 어깨도 넓어지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수줍게 웃었다. 사실 고3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헬스를 쉬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는 중이었어? 이 시간에 지하철이면 당연히 출근 중인가?”

그때 내 시냅스가 그동안 보인 적 없던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0.3초도 안 걸리는 찰나의 순간에 뇌에서는 36가지의 경우의 수로 거짓말을 지어냈다. 취업을 준비하는 내내 숱하게 상상했던 K그룹 신입사원으로서의 내 모습이 무의식 속에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솔직히 최종 면접까지 간 거면 합격이라고 말해도 되잖아?’     

“아, 나 K그룹 식품 쪽 다니고 있어.”


“오오, 김정훈. 멋있는데? 거기 요즘 엄청 들어가기 어렵잖아!”

나는 지수의 칭찬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역시 학교 생활 열심히 하더니 잘살고 있었네. 나는 A 항공 다니다가 퇴사했어. 한 6개월 정도 다녔나? 로망이랑 현실은 확실히 다르더라고. 하하. 한심하지? 지금은 열심히 취준 하는 중이야.”

나는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여신의 입을 지금 당장 틀어막고 싶어서 ‘에이,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뭘’을 변형한 문장들을 연신 내뱉었다. 지수는 나의 위로에 고맙다며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예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예전에 어떤 학자가 배탈 원인의 92%가 심리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아름다운 대화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복통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환승역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계단에서 지수가 갑자기 나를 막아서며 말했다.

“사실, 아깐 부끄러워서 바로 말 못 했는데, 나도 K그룹 식품 면접 가는 길이었어! 어떻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오늘이 최종 면접날인데 꼭 붙었으면 좋겠다!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예비 선배님~!”     


지수는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어어, 그렇구나.”

나는 턱에 힘을 잃고 흐물흐물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수가 나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그것도 같은 회사의 면접시험을 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30분도 안 되어 탄로가 날 거짓말을 내뱉은 자신이 미치도록 한심했다. 내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게 들통나면 지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 당장 혀를 깨물어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러자 갑자기 배꼽 아래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동안 대화에 집중하느라 잠시 미뤄둔 설사들이 파도를 이루며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창자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진짜 생각할수록 대박이다 정훈아. 이런 게 운명 아닐까? 면접 보러 가는 길에 대학교 동창을 만나는 것도 신기한데 그 친구가 내가 면접 보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니!”

지수는 순수하게 웃으며 내게 K그룹의 연봉과 복지는 어떤지, 내 직무는 어떻고 회사 분위기나 문화는 어떤지, 그리고 최종 면접의 예상 질문은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나중에 자신이 합격하고 나면 꼭 한 턱 내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저, 저기 지수야 사실은..”

지수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종알종알 말을 끊지 않았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등에는 진땀이 조록조록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땀과 땀 사이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이 곧 어떤 굉장한 것이 분출될 예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A 항공사 다닐 때 가장 좋았던 점이 숙박비 지원이었어. 진짜 편했거든. 제휴된 여행사가 많아서 전국 어디든 놀러 다니기가 참 좋았어. 그것 때문에 퇴사를 많이 고민했었지. K그룹 복지는 어때?”

“저, 사실은 내가..”

“아하 K그룹은 계열사도 무지 많으니까 혜택 같은 건 A사보다 훨씬 많겠구나? 내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네. 하하. 부끄러워.”

“그, 내가 있잖아..”

“어? 이제 우리 타는 지하철이 벌써 도착했나 보다. 얼른 타자!”

지수가 내 소매를 잡고 확 끌었다. 그런데 전직 승무원의 악력이 어찌나 세던지 내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쿵 소리와 함께 지수 위로 엎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온몸에 힘이, 특히 하반신의 긴장이 느슨해졌다.       

   

그다음부터는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눈을 뜨자 많은 사람이 나와 지수를 에워싸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빼고.

“에고, 젊은 사람이 저런, 저런...”

어떤 할아버지가 왼손으로 코를 싸쥔 채 오른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어우, 토할 것 같아.”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와, 씨발. 저거 뭐냐?” 교복을 입은 무리에서 남학생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며 엉덩이 밑쪽에서 기분 나쁜 뜨듯함이 느껴졌다. 지수는 어디 있을까? 내 바로 옆에서 지수처럼 보이는 여자가 엎어진 채로 엉엉 울고 있었다.

“지, 지수야. 괜찮니?”

나는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며 엉거주춤 일어나 지수에게 다가갔다.

“저리 꺼져버려! 옷에 다 묻었네. 어떡하지? 흑흑.”
 지수가 끅끅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번진 마스카라 때문에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알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 몸에서 지수의 스커트로, 복합적인 냄새가 풍겼다.

아침 일찍 지친 심신을 일으켰을 직장인들의 피로 냄새, 사람과 일에 치여 멍든 사과처럼 서글픈 사회 초년생들의 상처 냄새, 꼭두새벽부터 소일거리를 찾아 나선 노인들의 곤궁한 냄새, 그리고 이 그들이 지하철 역사에서 잡탕찌개처럼 뒤섞여 풍기는 진땀 냄새.     

나를 괴롭히던 뜨거운 것이 몸 밖으로 나가자, 목덜미와 등줄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흥건하게 드러내던 진땀은 말랐다. 하지만 눈에서 땀보다 더 뜨거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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