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그만하고 싶다. 전부 다 그만두고, 떠나고 싶다.
내일이 싫어서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이 일을 계속하냐고?
왜 계속 버텼냐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대한민국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들 한쪽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사는 것이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든 괜찮은 척, 적응한 척하면서 말이야.
벌써 내 나이는 오십하고도 셋. 처자식도 없이 의리 하나로 큰 형님만 바라보며 33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갑자기 쿠데타라니. 요즘 것들은 개념도, 의리도 없는 것 같다.
다음은 무조건 내 차례겠지.
나는 사실.. 아버지의 염원처럼 공무원이 되었어야 했다.
그랬으면 지금쯤 평생 성실히 쌓은 곳간 속에서 따뜻한 노후를 계획하고 있었겠지.
“형님, 괜찮으십니까?"
막내 지우의 목소리가 나의 무의식을 가로지르며 귀에 꽂혔다.
“응?” 나는 여전히 흐린 눈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두혁이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행님, 솔직히 요즘 뭔 일 있으시죠?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요즘 뭔 일 있습니까?
도대체 왜 그래요? 뭐, 얼라라도 생기셨어요?"
“이 새끼가. 내 나이에 얼라는 무슨 얼라. 해장이나 하러 가자. 속 쓰리다.”
두혁은 당최 모르겠다는 듯 좌우로 죽 찢어진 눈을 동그랗게 모았다.
내 이름 민두혁.
우리 조직의 서열 14위이자, 만수 형님의 오른팔이다.
큰 형님께서 그렇게 되시고 나서 요새 만수 형님의 표정이 안 좋다. 원체 표정을 알 수 없는 분이라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지만, 우리 조직이 위험해진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사실.. 진짜 위험한 것은 나다.
지난달부터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는데 나 같은 깡패는 싫단다.
대머리와 문신은 참을 수 있지만 눈에 흙이 들어가도(억지로 넣을 생각도 없었지만), 때려 죽어도(난 내 여자는 안 때리지만), 조폭과 결혼할 수는 없단다.
평생 잘 먹여주고 재워줄 자신은 있는데. 우리 회사도 명절 보너스 잘 나오고 (가끔 큰 형님께서 명절에 한우를 보내주신다), 나름 4대 보험(후까시 보험, 자해공갈 보험, 중고차 보험, 보험사기)도 들어주는데 말이다.
조직에 몸을 담은 후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후회된다.
아니, 잘 생각해 보니 원래 나는 조폭 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찍 돈 좀 만져보겠다고 억지로 적응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게 분명하다.
오, 젠장.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얼라 하나 때문에 조직을 버리려고 하다니.
차라리 큰 형님 대신 내가 칼에 맞았어야 했다. 그냥 맞는 것도 아니고 아주 깊게 찔려서 뒈져 버려야 한다! 그래, 내일 해 뜨자마자 죽자 두혁아. 넌 살아서 안 될 놈이다. 조직의 미래를 위해서도 넌 뒤져야 해.
내 이름은 강지우.
경기 남부 경찰청 형사과 소속이다.
얼마 전, 장룡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조직의 두목 마철기가 중태에 빠졌다는 첩보를 얻고 6개월 만에 조직의 막내로 급하게 투입되었다.
어제 오후 부로 마철기가 의식을 회복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조직이 와해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직의 넘버 쓰리 최강욱의 쿠데타에 동조한 조직원들도 적지 않아서 장룡파의 세대교체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원래 형사과가 아니라 청소년 보호과다.
동네 양아치 고삐리들만 봤지 이런 '진짜' 조폭들은 처음이다..!
이 모든 건 오류다. 경찰청 DB에 오류가 생겨 과가 바뀌는 바람에 투입된 것이다.
게다가 나는 경찰이 된 지 겨우 18개월밖에 안 됐다. 아직 적응도 못 했는데 이런 막중한 업무에 투입되어서 매일매일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다.
여기 조직원들이 내가 경찰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쿠데타 세력들이 우리를 공격하러 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본부와 연락까지 끊어져서 지금 너무 불안하다.
어제도 울다가 지쳐 새벽 세 시쯤 잠들었다.
빨리,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내 이름은 최강욱이다.
나는 장룡파의 넘버 쓰리이자 소싯적에 전국에서 끗발 좀 날리던 칼잡이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차기 장룡파 회장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벌써 나를 핸드폰에 '큰 형님'으로 저장한 동생들도 더러 보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다.
내가 단 한 번도 형님의 자리를 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내와 작은 횟집을 열 생각이었다.
하지만 큰 형님의 환갑잔치 때 술에 취해서 케이크 칼로 묘기를 부리다가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그만 형님의 목에 칼을 찔러 넣어버린 것이다.
칼이 쇠칼이 아니라 플라스틱 칼이기만 했어도, 그날 무알콜 맥주만 마셨어도, 칼을 둘이 아니라 셋에만 돌렸어도,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아내와 수족관 두어 개 딸린 작은 횟집을 운영하면서 남은 광어에 소주 한 잔을 적시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는데.
조직의 우두머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라도 큰 형님께 사과를 드리면 되는 걸까. 큰 형님의 충신들이 나를 담그러 오진 않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내 이름은 마철기, 장룡파의 회장이다.
33년 전 만수와 함께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어느새 커져서 백 명이 넘는 동생들이 생겼다, 참 꿈만 같은 일이다.
사실.. 이건 악몽이다. 꿈이라면 지금 당장 깨어나고 싶다.
누가 제발 좀 나를 깨워주길 바란다. 시발 제발 이 지옥에서 나를 꺼내줘!
33년 전 동네에서 알고 지낸 동생 만수가 싸움을 좀 잘하길래
골목대장 같은 거 하면 잘 어울리겠다며 농담을 던졌고, 만수는 정말 내 말대로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짱이 되었다.
‘이러다 조폭 되는 거 아니냐? 그럼 내가 짱 할게. 네가 내 오른팔 해라'라는 말이 기막힌 우연을 거듭하면서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도중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만수 이 씹새끼가 갑자기 “형, 진짜 나갈 거면 왼손 새끼손가락 자르고 나가.”라고 씨부렸고, 그 말을 들은 다른 동생들도 멋있다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새끼손가락 없이 살겠는가? 무서워서 시도도 못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60이 다 되었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환갑잔치에서 꾀를 좀 부렸다.
물론 케이크 칼이 생각했던 것보다 뭉뚝해서 피가 많이 나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영락없이 죽을 것처럼 보였나 보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나는 적당한 틈을 타서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 해외로 뜰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나는 쇠로 된 케이크 칼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 쇠로 된 칼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쇠로 만들어졌어야 정상이지만 공장에서 원자재 공급에 문제가 생겨서 무늬만 쇠칼인 플라스틱 칼로 제작되었다.]
[은색으로 덧칠한 덕에 날카로워 보이지만 내가 자를 수 있는 건 빵처럼 부드러운 것들뿐이다. 그런 걸 베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런데 나는 사람의 목을 베었다. 다행히 그의 목에서 피는 나지 않았다. 휘두른 사람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무척 놀랐지만 베인 사람은 웃고 있었다. 나는 사용자가 민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쇠칼인 척했다.]
[지금도 플라스틱이 아닌 고철 쪽으로 분리수거되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그래도 적응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근데, 너희 인간들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타고난 성향과 엇갈리는 일상 때문에 몹시 불편하고 피곤해도
두툼한 가면이라도 쓴 듯이 괜찮은 척, 적응한 척, 자신의 부적응을 간신히 숨기고 꾸역꾸역 살고 있잖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너는 쇠칼이다.. 플라스틱이 아닌 무쇠로 만들어진, 쇠칼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