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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유리문

07

내가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건 차가운 유리문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유리 벽이나 유리상자라고 말해야 조금 더 정확하겠다.

마치 사창가의 쇼윈도처럼 나는 사방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고, 사방에서도 나를 투명하게 비췄다.

방마다 수 놓인 은은한 조명, 병원처럼 차갑고 건조한 실내,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와 각종 악취가 뒤섞여 쿰쿰한 공기. 이처럼 이곳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매우 간단했다.

나는 곧 내 좌, 우측, 위아래 모두 셀 수 없이 많은 유리방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란 말인가.

“어이.” 마침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봐, 정신이 좀 들어?"

좌측에서 나보다 덩치가 한참 더 큰 남자가 말했다.

그의 외모는 꽤 특이했다. 새까만 피부에, 머리를 감은 지 보름은 가뿐히 넘긴 듯 보였고, 짧고 뚱뚱한 코는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두상이 눈에 띄었다.

“여, 여기가 어디죠?" 목소리가 잠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게, 나도 몰라서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너는 딱히 기억나는 거 없어?" 남자는 초면임에도 오랜 친구를 대하듯 말했다.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당황스럽네요.” 원래 존댓말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말투와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꼬리를 내렸다.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여기 온 애들 다 기억이 없대. 어디에서 왔고, 뭘 하다 왔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더라고.”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낮고 굵었지만, 말투가 부드럽고 친근해서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끼익-]

그때, 갑자기 우측에서 문이 열렸다.


“저거 봐, 너도 여기 처음 들어올 때 저렇게 들어왔어.”

남자가 가리킨 곳으로 눈동자를 옮기자,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나체의 여성이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반대로 돌렸지만 곧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모두가 하나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방에 들어간 여자는 문이 닫힐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저는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나요?”

“글쎄 몇 주는 누워있었을걸?" 남자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게나 오래..."

“여기서 언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처음부터 힘 빼지 말고 일단 적응해야 해.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잘 버틸 수 있어."

남자는 이곳에 온 지 꽤 오래돼 보이는 것이 터줏대감 같았다.

때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배고프지? 밥 받고 싶으면 저기 개인 식판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나도 누가 주는지, 뭘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판 근처에서 계속 서성이다 보면 누가 음식을 갑자기 채워주더라고. 물은 항상 채워두고."

정말 남자의 말대로 유리문 밖을 응시하면서 식판 근처를 서성이고 있으면 밥이 채워졌다.


밥은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이게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무슨 맛인지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으나, 식판은 금세 비워졌다. 배가 부르니 이제 반대로 배출 신호가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좌측 방의 남자에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화장실? 너 뒤에 있잖아.”

이번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 뒤에는 내 몸의 3배 정도 크기의 하얀색 깔판이 두툼하게 깔려 있었다.

'이게 화장실이라고요?'라는 물음을 내뱉기도 전에 나는 깔판 위로 올라가 한 자루의 똥을 내려놓았다.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떠한 수치심도, 불편감도 없이 나의 일에 집중했다.

속이 시원해지자 이번엔 잠이 쏟아졌다. 밖에서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내 눈꺼풀의 무게는 바위보다 무거웠고 눈은 모래알이 끼인 듯이 건조했다. 점차 바다보다 깊은 잠에 점차 빨려 들어갔다.

선잠이 들었는지, 귀는 열려있었으나 눈은 떠지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으으, 지독한 냄새."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잖아. 이 정도면 깨끗한 편이야.”

“하긴, 지난번에 갔던 곳은 너무 더럽더라. 애들이 불쌍했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소리가 웅성거렸다.

“얘는 귀엽긴 한데 자라면서 못생겨질 거 같아.”

“그런가? 얘네는 원래 못생긴 맛으로 키우는 애들이잖아.”

“얼마예요? [...] 헐, 70만 원이나 해요?”

“에이 그 돈이면 여기서 안 사죠. 딱 봐도 믹스 같은데. 아픈 애들 속여서 파는 거 아니죠?”

발걸음이 멀어지자 이번엔 반대쪽 방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줘! 여기 좀 봐!"

"들었으면 대답 좀 해! 나 여기 들어온 지 6개월이 넘었다고!"

"제발 나 좀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이 씨발놈들아!"


유리문을 쿵쿵 밀치는 소리와 함께, 손톱과 발톱으로 유리를 끼긱끼긱 긁는 소리가 들렸다.

간혹 이빨로 문틈을 깨무는 소리도 들렸다. 소음을 뚫고 발걸음 소리가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저기 자고 있는 애는 얼마예요? 중성화는 된 거죠?"

"어우, 당근이죠. 근데 털이 좀 많이 빠지는 종이라서 아파트에서 키우시기에는 좀..."

"그럼 저 옆에 까만 애는요? 덩치는 제법 있어도 귀엽네요."

"쟤는 나이가 좀 있는데 괜찮으세요? 만약 두 마리 한꺼번에 데려가시면 조금 많이 저렴하게 드릴게요."

"오 정말요? 음, 일단은 아내랑 좀 상의해 볼게요."

나는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고, 유리방 밖 중앙에 쓰인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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