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나 오늘 늦으니까, 저녁은 이걸로 사 먹어.”
희선은 준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식탁 위에 구깃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올려다 놓았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냉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어묵볶음 그릇에서 흘러나온 물기가 지폐를 적셨다.
“네에.” 준모는 헤드셋 사이를 미처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 희선의 말을 대충 짐작하여 대답했다. 그는 이제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희선이 식탁 위에 2만 원이 올려놓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희선이 집을 나서야 준모의 하루는 시작된다.
올해로 서른넷이 된 준모는 백수로써의 삶에 완벽히 적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다.
잘 구해지지도 않을뿐더러, 평생을 교직에 바친 그의 부모에게 매달 적지 않은 연금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서른까지만 해도 전공을 살려 기간제 교사 자리라도 알아봤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숙식이 제공되고, 혼자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비가 하루에 2만 원씩 너끈히 주어지니 굳이 땀 흘려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사용하지 않는 기관이 자연스럽게 퇴화되는 것처럼 준모의 인생에서 취업도 서서히 퇴화되었다.
준모의 취미는 구걸이다.
은유나 조롱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걸이다.
그는 희선이 집을 나가고 정확히 5분 뒤에 영등포역으로 떠난다.
침대 밑 너덜너덜한 옷을 꺼내 입고, 얼굴에 구두약을 덕지덕지 바른 채.
그가 영등포역에서 구걸을 시작한 건 지난 11월부터다.
그 계기에 대해서는 준모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다이소에서 3천 원을 주고 구매한 바퀴 달린 간이의자와 천 원짜리 바구니에 까맣게 손때가 베인 걸 보아 그의 구걸에도 점차 노하우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준모는 영등포역에서 어머니의 자궁보다 더 깊은 평온을 느낀다. 역사(驛舍)를 뒤덮은 수많은 인파는 사람의 온기를 뿜어주었고 준모의 몰골에 동정심을 느낀 사람들로부터 날아드는 따뜻한 빵과 음료수는 그의 혈당을 기분 좋게 끌어올려주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그는 정말로 거지처럼 공복에, 씻지도 않고 이곳에 온다.
그리고 느낀다. 이곳, 사람도 많고, 사건도 많은
영등포역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준모는 능숙하게 간이의자 위에 배를 깔고 라디오를 틀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의 쾌감이 찌르르 느껴졌다.
“예에 천국! 부우울신 지옥!"
다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이 우렁찬 저 소음공해.
저 듣기 싫은 포교 활동이 그의 평화를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보기 싫게 떡 진 머리와 그 위에 팽팽하게 끼워진 선캡, 정돈되지 않은 후덕한 몸매, 침 발라가며 한 장 한 장 넘기는 너덜너덜한 성경 한 권,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강의용 마이크까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영락없이 사이비 종교인이었다.
준모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외계어에 가까운 방언과
8월의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서 영등포역 지하상가로 들어왔다,
실내도 무척 더웠지만 그래도 눈을 뜰 수 없이 강렬한 햇빛과 고흐처럼 귀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시끄러운 전도 활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준모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곧 우리 앞에 모습을...”
준모를 따라서 그 여자도 내려왔다. 그녀가 믿는 신은 그녀에게 더위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은 듯하다.
“여기 이 남자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이렇게 구걸해도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영원히 외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이비 교인이 준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쩌렁쩌렁한 목청과 정확한 발음에 사람들의 이목이
순간적으로 준모에게 집중되었다.
“아니, 아줌마. 저한테 왜 그러세요." 당황한 준모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그러니까 평상시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충만하면...
어? 잠깐만, 너, 준모 아니니? 네가 왜 여기에...’
여자는 적잖이 놀랐는지 곧장 선글라스를 벗고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엄마?"
그녀는 준모의 엄마 희선이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교직에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귀싸대기를 올려주고 싶었던 적이 참 많았지만 희선은 꾹 참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퇴직연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비슷한 기간 동안 교직에 섰던 남편에게도 비슷한 금액이 나올 것이었다. 그 돈을 함께 모아서 노후에는 세계 각국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한창때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을 즐기며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세 번째 사업 실패와 아들의 취업 실패로 그녀의 공든 탑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의 소개로 '세진교'라는 기독교의 신흥종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희선은 그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편안했다.
“아아, 이거? 엄마 취미야. 아들은 여기에서 뭐 하고 있었어? 돈, 돈 때문에 그래?”
“아, 아니에요. 이거, 이것도 내 취미예요.'
두 사람 사이에서 꽤나 어색하고도, 긴, 정적이 흘렀다.
둘 뒤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비 교인 그 옆에 또 다른 사이비 교인이 덮쳐서 지나갔고 준모의 바구니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도 종종 들렸다.
두 사람의 어색한 정적은 겨우 깬 것은 한 남자의 비명 섞인 외침이었다.
“부, 불이야!"
어디선가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지하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출구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
“엄마, 일단 여기서 나가요."
“그, 그러자. 갑자기 웬 불이 났다니.”
그때였다.
연기를 비집고 튀어나온 불길이 높이 솟더니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녹슨 금속판에 깔린 어린아이가 다리가 부여잡고서 꽥꽥 소리를 내며 울었고,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 살길을 찾느라 두 모자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해져 이젠 출구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아이가 다쳤어요!"
엄마의 간절한 외침에 희선과 함께 뛰던 준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엄마."
“어, 왜?” 희선이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제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네가? 무슨 수로.”
준모는 곧바로 아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천장을 이루던 금속판이 다리를 깔아뭉개는 바람에 다리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아이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준모는 일사불란하게 바퀴가 달린 자신의 간이의자를 금속판 아래에 받쳐
살살 움직여보기 시작했다. 꿈쩍도 하지 않던 금속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준모의 행동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의 엄마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아니, 구해준 건 우리 아들인데 왜 하느님한테 감사해요? 내 아들한테 감사해야지요."
희선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연기에 콜록대며 아이의 엄마가 대답했다.
“이제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야 될 것 같아요.” 준모가 소리쳤다.
“엄마는 마이크로 구조요청을 해주시고 저는 물 좀 화장실에서 퍼올게요! 어머님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가셔서 119에 신고 좀 부탁드릴게요.”
준모는 구걸 바구니를 들고 화장실로 뛰었고, 희선은 통로로 향했다. 그 사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업고 불길의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도와주세요! 여기 다친 사람이 있어요!" 이윽고 희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검은 연기를 뚫고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들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바구니 한가득 물을 실어 나르는 준모의 움직임은 전혀 무기력해 보이지 않았고,
희선도 한때 학생들 사이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렸던 것처럼 당당하고 위엄 있게 소리쳤다.
소방대원들이 도착한 후에도 그들은 쉬지 않았다.
준모와 희선은 전혀 지친 기색도 없이 분주하게 소방대원들을 도왔다.
불길이 치솟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 위에 핀 미세한 웃음꽃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큰 화재가 나서 수백 명의 시민들이 대피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는데요, 위험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현장에 남아 사람들을 구한 시민 영웅이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특히 두 시민 영웅의 관계가 모자 관계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더욱 큰 감동을 주었는데요, 그 따뜻한 소식을 임한선 기자가 전합니다.”
인터뷰 장면 속에서 준모와 희선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세간의 주목은 둘째 치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넷 검색어를 압도하기 시작하자, 각 기업과 정부 기관에서는 두 사람에게 '용감한 시민상'이라는 명목으로 적지 않은 포상금과 상패를 전달했고 모 기업의 대표는 다짜고짜 준모를 회사에 특별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준모와 희선은 자신을 다르게 대하는 세상의 태도에 어쩔 줄 몰랐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는 거지와 시끄러운 사이비 교인이었던 두 사람을 '영웅 모자(母子)'라고 찬양하니 말이다.
오늘도 희선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뽑아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나 오늘 늦으니까, 저녁은 꼭 이걸로 사 먹어.”
그리고 신발장에 붙은 거울을 보며 앞니에 살짝 묻은 빨간 립스틱을 휴지로 훔쳤다.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성경책도 잊지 않고 가방에 푹 찔러 넣는다.
“네에. 저도 오늘은 늦어요."
준모는 헤드셋을 낀 채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희선이 나가고 정확히 5분 후 준모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얼굴에 꼼꼼하게 구두약을 바른다. 이미 넝마가 된 옷과, 조만간 엄지발톱이 뛰쳐나올 것 같은 신발, 바퀴가 조금 찌그러졌지만 여전히 잘 굴러가는 간이의자, 그리고 불길에 살짝 그을려 녹은 흔적이 선명한 바구니까지 챙기면 모든 외출 준비는 끝난다.
그들은 오늘도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사람도 많고, 사건도 많은 바로 이곳, 영등포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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