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대리님은 연애 안 하세요? 저는 내년쯤 프로포즈하려고요.'
'민정 씨는 동안에다가 늘씬해서 아직 20대들한테도 인기 많을 텐데?'
‘내가 좋은 남자 소개해줄까? 이번에 나 아는 사람이...’
미안한데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거, 나는 하나도 관심 없어.
그러니 너네도 나한테 관심 꺼줄래? 아니면 그냥 꺼져줘도 좋고.
올해로 (만) 서른세 살이 되어버린 나.
그리 복잡한 남자관계도 없었지만, 모험심과 사교성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아서 영원할 줄만 알았던 나의 이십 대는 일만 하다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나는 사치도, 투자도 몰라서 돈은 (오피스텔 전세금 포함.) 1억 조금 넘게 모았고 지금도 사는 데 부족함이나 후회는 없다. 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나 같은 여자에게 기대하는 '남성들을 향한 혐오심', 그딴 것도 전혀 없다. 좋아하면 좋아했지.
이제 내게 남은 거라곤 간간이 피어오르는 성욕뿐.
20대 후반부터 담배와 함께 독학으로 익힌 탁월한 자위 스킬 덕분에 육체적인 외로움도 사실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다만, 사회생활 중 나를 옥죄여오는 이 불쾌감,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이 나를 향해 던지는 과도한 관심과 친절이 몹시도 불편할 뿐이야.
일단 웃는다. 왜, 웃으면 온 세상이 나와 함께 웃어준다는 말도 있잖는가.
“에이, 요즘 애들 눈이 좀 높은 가요. 저 같은 노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걸요.
나보다 젊고 이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기 지현 씨만 봐도 그런데."
방금까지 내가 느낀 불쾌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면서 내가 공격을 흘리니까 마치 바늘이라도 씹은 것처럼 쩔쩔매는 비겁한 자들.
"역시 판단력이 좋으시네. 요즘 서른 넘어서도 만나는 사람 없으면 그냥 혼자 사는 게 맞죠. 솔직히 누구한테 맞춰줄 생각도 없고 누가 맞추는 것도 불편해서 혼자 사는 거잖아."
오, 이것 봐라? 아주 훅 치고 들어오는데? 미안한데 난 꽤 멘탈이 강해서 그렇게 대놓고 꼽주는 말에는 잘 상처받지 않는다고. 근데 너 같이 매사에 삐딱한 새끼는 정말 봐주기 싫어진다. 안 되겠다. 혼 좀 내줘야겠어.
"죄송한데요, 정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말 하면 더 추해지는 거 알죠?"
김정훈 대리. 나랑 비슷하게 입사한 사람이지만 몇 개월 전 약혼녀의 상간으로 회사 사람들에게 청첩장까지 돌려놓고 파혼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근처도 안 가본 사람보다는 낫지." 들릴 듯 말 듯했지만 난 분명히 들었다.
이 사람도 보통은 아니다. 김정훈은 무표정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나도 괜히 손가락으로 카페 테이블을 툭툭 친다.
"아아, 저기 이번 휴가 때 계획 있으세요?" 보다 못한 지현 씨가 화제를 돌린다.
"왜요? 남친이랑 어디 좋은 데 가서 자랑하려고?" 역시나 김정훈 대리. 그만 좀 해라. 이 뼛속까지 삐딱한 새끼. 어디 척추측만증이라도 있니?
"아, 아뇨. 그냥 다들 어디 가시나 궁금해서요, 헤헤."
지현이 혀로 앞니를 훑으며 웃는다. 원래 없던 버릇 같은데 최근 교정기를 뺐다던데 어색한지, 아니면 정말 여기서 누굴 홀리기로 작정했는지 요즘 따라 자꾸 저렇게 웃는다.
"음, 나는 고향 친구들하고 강릉에 가기로 했어. 와이프가 애들 데리고 친정 간다고 해서. 어때, 타이밍 기막히지."
팀장이 아주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현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선 '응, 대머리. 네가 어디로 가는지는 안 궁금해.'라는 표정이다.
"저는 혼자 강원도 동해 쪽에서 캠핑하러 갑니다." 역시 너는 혼자 다닐 것 같더라.
"오, 저는 친구들이랑 정동진 가기로 했어요! 마주치면 오징어 회 사주세요!"
정동진에서는 강릉이 훨씬 더 가까운데. 지현은 컬러렌즈로 반짝이는 눈빛을 팀장이 아닌 정훈 쪽으로 쏘았다.
"글쎄요, 저는 별 계획 없네요. 날도 더운데 어디 가지 말고 출근해서 에어컨이나 쐬려고요." 내 대답을 듣고 아주 짧은 정적이 생겼다. 억지로 쥐어짜 낸 대답처럼 들리겠지만 정말이다. 휴가철 성수기면 물가가 두 배인데 가긴 어딜 가. 그냥 9월 말까지 기다렸다 남들 일할 때 혼자서 실컷 놀아야지.
"안 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못 가는 거 아니에요?"
이 새끼가 더위를 처먹었나? 아까부터 나한테 왜 이래? 아니면 몰래카메라야? 원래도 다크한 성격이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어?
"아, 대리님 오늘 컨디션 안 좋으신가 봐요. 아니면 너무 좋으신 건가. 하하."
신입사원 영준이 분위기를 살피더니 이 께름칙한 분위기를 종료한다.
"그래, 오늘 정훈 씨 안 좋은 일 있었어? 아까부터 표정도 안 좋더니만."
분위기를 중화하려고 억지로 웃으며 한 마디씩 건넨다. 역시 집단주의의 나라답네. 한 명이 나서지 않으면 누구 하나 망가지기 전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잖아. 드디어 김정훈이 닥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혈당 스파이크 때문에 시간도 평소보다 천천히 가는 것 같다. 대머리라서 더 잘 보이는 팀장님을 선두로 헤드뱅잉이 시작되었다. 하나둘씩 고개를 떨구며 본인의 정수리를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졸릴 때면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우리 회사 건물에는 저층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흡연실이 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 시간대에 이곳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 된다.
어떤 싸구려 감성 에세이에서 나만의 도피처 하나쯤 필요하다고 그랬는데 내겐 이곳이 바로 도피처다. 혼자 있고 싶은 순간마다 찾게 되는 도피처. 그런데 말이지. 김정훈 저 사람은 여길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것도 담배도 안 피우는 양반이.
젠장, 바로 뒤돌아서 다른 흡연실로 가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해요." 역시나 듣기 싫은 음역대, 듣기 싫은 말투. 환상적이다.
"뭐 하긴요. 담배 피우러 왔죠."
"하긴, 당연한 걸 물어봤네요."
나는 정적이 싫다. 특히 불편한 사람과의 정적은 더 싫어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황급히 입을 막았다.
"저기, 아깐 미안했습니다.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네요." 이게 사과냐?
"아닙니다. 뭐, 장난도 좀 섞였을 거잖아요." 이 X발놈아.
"장난은 아니었습니다. 제 표현이 조금 거칠었던 거죠." 이 X발롬이?
"앗, 네."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후 내뱉었다. 곧 심박수가 꽤 안정되었다.
"실은요, 아까부터 여기 오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어라?
"민정 씨한테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아 제발.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진다.
"예? 뭐가요?" 나는 찝찝한 분위기에 괜히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혼자 산다는 거요. 보니까 전부터 마주치는 사람마다 꼬치꼬치 캐묻잖아요. 왜 혼자가 됐고, 무슨 일이 생겨서 혼자가 됐는지 말이에요. 사람들의 질문에는 이미 의도가 담겨 있잖아요. 말 못 할 사건 사고라도 있었겠지, 하면서. 만약 없다면 혼자 지내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믿고요."
"아." 존나 다행이다. 갑자기 고백하는 줄 알았네.
"저야 무슨 사고가 생겨버렸지만.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다행이다 싶어요. 누구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조상신이 도왔다고."
입사 후 처음 보는 김정훈의 인간다운 표정. 평소 사납게 인상을 찌푸리는 표정만 봐서 몰랐는데, 이목구비가 제자리로 돌아온 모습을 보니 꽤 선한 인상처럼 보인다.
"맞아요." 나는 천천히, 부드럽게 정적을 깼다.
"다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내가 진짜로 결혼하겠다고 말하면 도대체 얼마나 축하해 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나는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막말로. 요즘 결혼 안 하든, 했다가 돌아오든, 아니면 두 번 하든, 그딴 게 뭐가 대수인가요? 다 각자의 인생을 사는 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의 개인주의가 좋다고 발광하지만 남한테 관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요. 짜증이 날 정도로. 민족의 DNA가 그렇게 못 살도록 설정이라도 되어 있는 건지."
술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이렇게 조곤조곤 말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요. 저는 앞으로도 혼자 살 거고요, 잘 살 자신이 있어요. 와이프랑 애기 때문에 적금도 안 들어도 되고, 사고 싶은 캠핑 장비나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사면서 가족이랑 주변에도 좀 베풀면서, 그냥 나대로, 나 잘난 맛으로 멋지고 재밌게 살 거예요."
"나도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언젠가가 아니라, 당장 오늘 퇴근길에 지하철이 뒤집혀버려서 다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종속되어서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릴 바엔 나 혼자 재밌게 살다 혼자 갈 거니까 다들 신경 좀 껐으면 좋겠어요! 제발!"
결의에 가득 찬 정훈의 말투 때문에, 어느새 나까지 아주 결연해졌다. 하지만 이윽고, 우리는 다시 현생으로 돌아왔다. 일순간에 깊어지는 적막. 과열된 공감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김정훈과 나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면서 나는 심각한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쥐구멍이라도 좋으니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재빨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는 영준 씨 말고는 아무도 없다. 다들 각자의 도피처로 떠났나 보다. 담배 피우는 동안 팀장에게 온 메신저 내용을 확인했다.
[지난주 광고 인사이트 관련 보고서는 출력해서 내 자리에 제출해 줘.]
내가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나. 나는 메신저를 보자마자 빠르게 보고서를 뽑아 호치키스를 박고 팀장의 자리로 뛰어갔다. 아직 모니터가 켜져 있는 걸 보아하니 팀장도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모니터 옆에 보이는 단란한 가족사진. 사진 속 팀장의 머리숱이 빽빽한 걸 보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대머리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사진에 정신이 팔린 채로 자리에 보고서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오, 이런 젠장! 팀장의 커피에 보고서 아랫부분을 조금 담가버렸다. 휴지로 지우기엔 늦었고, 다시 뽑으려고 고개를 돌리던 차에 정말,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팀장의 메신저 목록을 읽고 말았다.
[ㅠㅠㅠ 아깐 죄송했어용♡ 5분 뒤에 지하 주차장에 오세용. 제가 화 풀어드릴게용!]
메시지의 주인공은 '김지현'이었다.
"와 씨, 설마.."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육성을 내버렸다.
이걸 어떻게 참는가. 나는 주변을 둘러본 후 심장을 부여잡고 최대한 은밀하게 팀장의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팀장이 지현과 나누던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팀장: [아까 카페에서 왜 나한테 말 걸고 딴청 부렸어?]
지현: [그야 다른 사람들이 알면 곤란해지니까요 ㅎㅎ]
팀장: [그렇다고 정훈 씨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지현: [ㅠㅠㅠ 아깐 죄송했어용♡ 5분 뒤에 지하 주차장에 오세용. 제가 화 풀어드릴게용!]
모니터 옆 가족사진에 담긴 사모님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져 보였다. 역시 남의 연애는 언제 봐도 재밌다. 이 재밌는 걸 어떻게 참아! 아, 혼자서만 알고 있기엔 너무 벅차다. 김정훈한테도 말해볼까? 아니지. 분명 재미없게 반응하겠지. 그냥 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려볼까. 벌써부터 설렌다,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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