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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반려(伴侶)

04

사무실 시곗바늘이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까스로 일을 처리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인데, 정말 늦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또 나쁜 아빠가 된다.


오늘은 자루와 내가 함께 산 지 벌써 3년째 되는 날이다.

홀로 어둡고 조용한 집을 외롭게 지키고 있을 자루를 떠올리며 엑셀 위에 얹은 발을 더 깊게 밟았다.


도로 위에서 멀어져 가는 가로등을 보며 자루와 만난 첫날을 떠올렸다.

자루는 가로등 조명처럼 새하얗고 밝았다.

그래서 이름도 '두부'나 '흰둥이'로 지으려고 했으나, 밖에서 오랫동안 떠돌았는지 빗자루처럼 산발이 된 녀석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자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루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는 듯이 탁했고 많이 외로워 보였다.

그 아이의 유일한 친구는 배고픔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배부름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자루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배가 고플 때, 심심할 때마다 나를 찾던 자루는 어느새 내 가족이 되었다.


자루는 여자아이다. 생긴 건 착하고 온순하게 생겨서는 때때로 뜬금없는 장난을 쳐서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얼마 전에도 자루가 장난을 치다가 안방의 장식장을 엎었는데 나는 전혀 화내지 않았다.

장식장 속 어머니의 유골함이 쏟아지고, 몇 개 남지 않은 내 가족사진들이 구겨졌지만

나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죽고 사라진 가족보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는 가족이 더 중요하니까.

연락을 아무리 끊어도 어떻게든 찾아와 돈 달라며 귀찮게 하는 가족보다 아무 말 없이 예쁜 눈빛으로 살갑게 말을 걸어주는 가족이 더 좋으니까.


그래서 나는 화내는 대신 자루의 행동반경에 위험한 물건을 두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우리 집은 더욱 심플해졌다.

거실에는 자루의 밥그릇과 물그릇, 그리고 배변 패드가 전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꿉꿉한 냄새에 바퀴벌레까지 지나 들던 더러운 집이 쾌적하고 깨끗해진 건 모두 우리 자루 덕분이다.


사람들은 내가 자루를 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루가 나를 구했다.

자루가 생긴 뒤로 내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세상과 단절된 채 일 중독, 담배 중독, 술 중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지우듯이 살던 내가 자루 덕분에 하루하루를 채우듯이 살고 있다.

나는 길거리를 떠돌던 자루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주었을 뿐인데, 자루는 마음의 고향을 잃은 내게 새로운 터전이 되어주었다.


이젠 자루가 없는 삶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비록 녀석이 말을 할 수 없어 우린 눈빛으로 대화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녀석도 이제 내게 깊이 의지하고 우리가 피보다 진한 가족이 되었음을.

나는 집에 도착하기 직전 24시 마트에서 자루를 위한 선물, 목줄과 케이크를 샀다.

녀석이 기뻐할 것을 상상하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집에 가면 뽀뽀도 많이 해주고 마구 쓰다듬어줘야지.'

자루는 내가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집에 들어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를 반긴다. 오늘도 그럴 것이다.


자루는 귀가 무척 좋아서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내 발걸음 소리를 알아맞힌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발걸음을 극히 조심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나를 기다리다 지친 녀석이 이제야 잠들었을 텐데

나 때문에 단잠까지 깬다면.. 정말 상상하기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나는 조용히 덮개를 열어 비밀번호를 천천히 누르고, 덮개를 닫았다.

기계음이 들리며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가 이상했다. 원래는 덮개를 열고 첫 비밀번호를 누를 때부터 집에서 기척이 들려야 하는데 오늘따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자루가 나를 위해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한 것은 아닐까? 물론 출근 직전에 오늘 저녁을 기대하라는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말을 말 못 하는 짐승이 어찌 알아듣냐는 말이다.

혹시 오랫동안 함께 살면 텔레파시 같은 것이 통하는 걸까?


나는 찝찝한 마음에 문을 확 열었다.

역시나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자루야 어디 있니. 아빠 왔어."

나는 방마다 닫힌 문을 열어 확인했다.

자루와 함께 살게 된 뒤로 거의 모든 가구를 처분했기에 숨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그때였다.

안방 쪽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루였다.

“자루야, 왜 여기 있었어!"

[...]

자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내가 위험하니까 거실에 있으라고 했잖아!"

이 기쁘고 좋은 날에, 나는 그만 화를 내버렸다.

자루는 내 말에 미안하다는 듯이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을 주르륵 쏟았다.

그 순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걱정과 당혹감, 그리고 실망감이 서로 교차되면서 분노라는 뜨거운 감정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

자루는 두렵다는 듯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기야 말도 못 하는 짐승 따위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어. 그저 끙끙대거나 덜덜 떠는 것뿐이지.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또 한 번만 거실에서 벗어나면 아빠가 아주 혼내줄 거라고.

전에도 안방에 있던 장식장 망가뜨려서 아빠한테 혼났잖아! 기억 못 해? 너 바보야?'

[...]

자루는 자신이 크게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주인으로서 너무 오냐오냐해 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묵직한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넌 정말 안 되겠다. 지금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야.”

나는 조금 겁을 줄 목적으로 상자에서 옷걸이 하나를 꺼냈다. 세탁소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싸구려 철사 옷걸이였다.

[...]

자루는 내가 들고 온 것을 보고 놀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녀석은 오금을 벌벌 떨며 바닥에 오줌을 잔뜩 지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나의 위화감 조성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루야. 내가 오줌은 어디에 누라고 했지?"

자루의 앓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자루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딘가 살기가 느껴졌다.

사뭇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녀석의 눈매를 보고 나니 녀석이 내는 소리가 심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얘가 이렇게까지 반항한 적이 없었는데.’

길거리에서 자신을 거두어준 은인에게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이래서 주인을 무는 개는 잡아먹으라는 말이 있는 건가.


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철사 옷걸이를 구겨 보다 굵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끝은 그대로 자루의 머리에 향했다.

자루는 깨갱 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이 새끼, 이 개새끼가, 감히, 주인을 노려봐? 어?"

내가 힘을 주어 타격할 때마다 자루의 흐느낌과 앓는 소리도 커져만 갔다.

벽에다 계란판 수십 장을 붙여놓았으니까 망정이지 이웃이 들으면 어쩌려고.

흠씬 두들겨 맞은 자루는 갈빗대를 훤히 드러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호흡이 거칠어졌고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우린 둘 다 흐느끼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내가 이성을 잃은 시간 동안 자루에게 새긴 빨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루의 상처는 난도질에 가까웠다. 마치 유통과정에서 이리저리 긁혀서 상품 가치가 확 떨어진 수산시장의 저렴한 물고기처럼 넝마가 되었다.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나는 순간적으로 내 모습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내가 누구 덕분에 이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는데. 내가 다시 사람처럼 웃고,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 다 누구 덕분인데.


나 같은 놈은 아빠라고 할 수 없다. 아니,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

나는 자루의 몸 구석구석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며 자루의 몸에 난 상처만큼 내 몸에도 똑같은 크기와 깊이의 상처를 내었다.

선홍빛 피가 터지며 화장실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비명을 터뜨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명이 새어 나올까 손수건을 입에 물고 자루처럼 끙끙거리기만 했다.

간혹 가다 힘 조절이 서툴러 자루에게 새긴 상처보다 깊은 상처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와 자루는 한 몸이니까. 우린 서로의 반려니까.

피를 꽤 흘렸는지 의식이 서서히 아득해질 무렵,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인가. 아니면 현관인가.


“감금 신고받고 왔습니다.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현관문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둔탁한 물체로 문을 억지로 따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힘겹게 거실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자루는 보이지 않았다.

“자루야, 우리 자루 어디 있어."

내가 안방 쪽으로 갔을 때 자루는 내 핸드폰을 들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와 침이 흥건하게 묻은 재갈이 떨어져 있었다.

“아니, 자루야. 너.. 어떻게."

“이 변태 정신병자새끼.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어떻게 3년을... 경찰 왔으니까.. 이제 다 끝났어!"

자루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댄 채 말했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식칼을 든 두 손을 발발 떨며 내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자, 자루야. 너 왜 그러니. 얼른 내려놔. 우리 자루 착하잖아.."

나는 뭔가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소홀했나?

아, 오늘은 참 중요한 날인데.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케이크에 촛불을 켜서 노래를 불러줄까.

간식을 꺼내주면 기분이 풀릴까. 자루야, 갑자기 우리 행복을 망치면 어떡하니..

내일부터는 목줄을 채우고 같이 밤 산책을 다니려고 했단 말이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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