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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영광의 기억

03

5...4...3...2...1!

눈을 떴을 때 기욱은 예정대로 1965년의 한국으로 도착했다.

성공확률이 98.9%로 다소 안전했지만, 실패하면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피부가 녹아내릴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었기에 기욱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기욱은 도착하자마자 풀밭에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부터 살폈다.

피부가 살짝 벗겨져 진물이 흘렀지만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시간여행 기계, '오스파이스'의 두 번째 부작용을 떠올렸다.

그것은 관절의 손상이었다.


뒤틀린 시공간을 온몸으로 버티니 피부의 극심한 화상뿐 아니라 관절이나 뼈, 근육, 장기 등의 내부적인 손상도 동반되었다.

그래서 그의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고 움직일 때마다 관절 마디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중력이 2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김기욱, 그가 누구인가. 테러리스트 마흔 명을 눈감고도 쓰러뜨린 특수부대의 전설이자 세계에서 가장 검거율이 높은 '타임 어레스터' 아닌가.

그런 기욱이 1965년 한국으로 파견된 이유는 하나다.

바로 현직 대통령의 암살에 실패하고 오스파이스를 훔쳐서 1965년으로 잠적한 테러리스트를 검거하기 위해서다.


곧, 기욱의 손목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팔을 타고 귓등까지 도달했다.


[아, 아, 잘 들리십니까.]

육성이 아닌 뇌파와 신경만으로 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특수장치, DMT를 통해서 온 연락이었다.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저희도 꽤 많이 해봤지만 할 때마다 떨리네요.]

“네. 확실히 이동 과정에서의 충격은 피할 수 없군요.”

[저희도 기욱 씨 등 쪽과 무릎과 허리 관절의 미세 손상을 확인했어요.

도착 직후 다리가 마비되어 곧바로 복귀한 어레스터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그렇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용의자가 어디로 갔는지 설명해 주세요.”

[현재 탈주 용의자는 건너편 폐건물에서 은신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본부에서는 절대 죽이지 말고 검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용의자와의 마찰은 최소화해 주십시오.]

“죽이지 말고라..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 워낙에 액션에는 자신이 있으신 분이니 저희는 크게 걱정이 안 됩니다.

기욱 씨는 세계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특급 어레스터잖습니까!]

“아, 네.."


60년대 서울의 밤은 왜인지 기욱에게 안락하게 느껴졌다.

고향처럼 푸근하고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기욱은 이유 모를 감상에 젖어 한동안 잿빛 폐건물을 바라보았다.

외관이 세련되지 않고 투박한 것이 꼭 거대한 비석같이 생겼다.


“어이, 거기. 당신 뭐야."

기욱은 뒤에서 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사복을 입었지만 단정한 머리 스타일, 큰 덩치가 한눈에 봐도 그들은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욱을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욱의 어레스터 복장은 눈에 띄기 충분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신분증 꺼내봐."


기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작부터 영 좋지 않군.'

기욱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최루탄 하나를 꺼내 바닥에 힘껏 터뜨렸다.

그리고 경찰들 사이를 비집고 건물 쪽을 향해 내달렸다.


시간 이동 과정에서 그의 관절엔 이미 깊은 충격이 가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폐 기능도 떨어져 빠른 속도로 뛸 수 없었지만 경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가만히 서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 추격하지도 않았다.


폐건물의 안은 밖과 달리 적막이 흘렀다. 기욱은 손전등을 켜서 어두운 건물 내부를 뜯어 살폈다. 그리고 곧, 이곳이 한창 운영 중인 병원임을 깨달았다. 병원의 내부는 꽤 현대식 건물 같았고, 크기도 작지 않았다.

일반적인 아파트의 5층 정도 되는 높이였다.


기욱은 이 건물이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대형 병원 내지는 요양 병원 같다고 생각했다. 기욱은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계단실로 들어갔다.


어떠한 생명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길게 늘어선 계단을 올려다보며 기욱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손전등을 입에 물고 주머니에서 용의자의 사진을 꺼내 살펴보았다.


친숙하고, 멀끔히 잘생긴 얼굴. 이자는 왜 선량한 시민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도모했을까. 기욱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 계단을 밟으며 용의자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이는 기욱만의 프로파일링이자 높은 검거율의 비결이었다.


'왜 많고 많은 은신처 중 이곳을 선택했을까. 나라면 이 병원의 어디에 숨을까.

일단 최고층까지 올라가 내려오면서 샅샅이 수색해 보자.'

그런데 시간 이동의 후유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욱은 숨이 가빠졌고 무릎 통증은 허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그가 온몸의 고통을 견디는 사이, 갑자기 문이 열리고

반 층 위에서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차, 찾았다!" 아까 마주친 경찰이었다.

“잡아라!"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 경찰들은 빠른 속도로 기욱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인원은 아까보다 늘어 거의 대여섯 명쯤 되어 보였다.

기욱은 난간을 잡고 거의 구르다시피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세계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타임 어레스터인 기욱이었지만, 시간 이동 중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하거나 역사적인 변화를 일으키면 다시 자신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도망을 택했다.


기욱은 경찰들을 향해 전기 지뢰 1발과 최루탄 2발을 던졌고, 우르르 몰려오던 그들은 일제히 고꾸라지며 서로 엉켰다.

“어휴 뭘 먹었길래 저렇게 날쌘 거야 진짜!"

“아오, 그러니까. 저 양반 혼자서 무슨 산삼이라도 먹었나.”


뒤따르는 경찰들의 탄식 소리가 들렸고 기욱은 그 말에 자신감을 얻었다.

관절 하나하나가 재생되고 굽었던 허리도 곧게 펴지는 기분이다.


“하하, 잡아봐라 이놈들!” 어느새 기욱은 자신도 모르게 경찰들을 비웃으며 희롱했다.

경찰들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에서 점점 작아졌다.


그가 숨을 고르고 있던 중, 갑자기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기욱 씨. 왜 건물에서 나오셨어요? 용의자는 아직 병원에 있다고 나옵니다.]

“아, 경비가 너무 삼엄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대기했다가 경찰이 빠지면..."

[지금 본부에서는 언제 검거되냐고 난리네요. 저도 일단 둘러대는 중입니다만...]

“네. 숨만 좀 고르고 다른 침투로를 찾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유, 걱정은 안 합니다. 저, 몸은 좀 어떠신가요.]

“다치진 않았습니다. 많이 움직였더니 괜찮아졌네요.”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제가 증원 요청을 넣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연락이 끊어진 후 기욱은 다시 심호흡하고 이번엔 건물 후문 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담배를 태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한 기욱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경찰들과 뒤섞여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레스터 복장의 사람들.

모두들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말투나 하는 행동을 보니 자신과 같은 타임 어레스터인 게 확실했다.


현장에 자신만 파견된 줄 알았던 기욱은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던 경찰 무리와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저 어레스터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혹시 당신도 어레스터입니까?"

기욱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과 같은 어레스터 옷을 입은 자에게 물었다.

“하하, 맞소. 당신은 지금 임무 수행 중이오?"

“그렇습니다. 경비가 삼엄해서 다른 침투로를 찾느라 지연되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들과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겁니까?"


멍하니 서 있던 기욱을 보며 그 어레스터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 그야 나는 임무 수행 중이 아니니까. 간혹 임무 종료 후 심심하면 여기에 앉아 옛날 사람들이랑 옛날 담배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갑니다. 재밌어요.”

“임무 수행 중이 아니면 오스파이스의 사용이 불법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기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쏘아댔다.


“허허. 역시 검거율 세계 최고라 그런지 정석대로 사시는구먼.”

“어이, 어이. 그만 좀 하라니까." 옆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경찰 한 명이 말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기욱을 잡으려고 따라오던 남자 중 하나였다.

기욱은 잘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상황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임무에 다시 집중했다.

'그래. 어차피 나는 내 임무만 완수하면 돼. 다 끝나고 본부에 돌아가면 이 사실을 알리자.'


이제 더 이상 경찰들도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기욱도 더 이상 뛸 필요가 없어졌다. 마음이 급해지지 않으니 다시 마주한 계단도 이제 더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절보다는 호흡이 문제였다. 시공간을 초월하면서 폐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삽시간으로 기욱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렇게 4층까지 올라갔을 때 철문이 확 열렸다.


“저, 혹시 김기욱 씨 맞습니까?”

기욱도 자신을 보자마자 이름을 맞춘 남자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맞혔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용의자였다.

“여기 있었군!” 기욱이 힘주어 소리쳤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자신에게서 도주해야 마땅할 용의자는 얼빠진 사람처럼 멀뚱히 기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욱은 이때다 싶어 용의자의 멱살을 잡아 벽에 짓눌렀다.


쿵 소리를 내며 뒤로 고꾸라진 용의자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욱이 미란다 원칙을 중얼거리던 무렵 용의자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용의자는 갑자기 기욱을 꽉 껴안으며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오셨어요."


“너, 지금 뭐 하는..." 기훈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제발.. 제발.. 좀 그만하세요 아버지. 이게 몇 번째인 줄 아세요?

이제 저도 힘들고 집사람도 너무 힘들어해요. 아버지..”


기욱의 머리가 핑하고 아득해졌다.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이기 시작했고 구역질이 나서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용의자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병실에서 수십 명이 나와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중에는 기욱과 같은 환자복을 입은 사람도, 덩치가 큰 남성 요양보호사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저 할아버지한테는 장난치지 말라고 했잖아. 치매 환자들이 얼마나 위험한데."


방금 전, 후문에서 기욱과 대화를 나눴던 남자가 덩치 좋은 직원에게 말했다.

“아이 참, 원래도 정신이 왔다 갔다 하던 분이셨는데 뭘 그리 새삼스럽게들."

“근데 이번에는 특히 잡기 어려웠어요. 어우, 어르신께서 오늘따라 힘이 장난이 아니시더라고요. 역시 소싯적에 검거율 1위 형사라서 그런가.'


기욱은 입을 벌린 채, 탁한 눈동자로 병원의 새하얀 벽지를 바라보았다.

용의자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여전히 뚝뚝 떨어졌고, 기욱의 턱에서는 맑은 침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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