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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룸메이트

10

2006년 겨울, 나와 지만 씨는 길거리에서 만났다.

깡마른 몸에 장발의 곱슬머리, 누더기에 가까운 옷과 낡은 뿔테안경.

지만 씨의 첫인상을 보고 나는 직감했다. 그도 나와 같은 길거리 신세라는 걸.

사람의 온기가 아닌, 매일 박스나 쓰레기를 둘러야만 겨우 온기를 찾는 불쌍한 신세라는 걸.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지만 씨에겐 집이 있었다. 그것도 방이 3개나 되는 꽤 넓은 집이.

심지어 차도 있었다. 4인 가족을 염두하고 산 듯이 넓고 각진 SUV가.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나에게 혼자서 너무 오래 살아온

한국 남자의 집 냄새란 가히 치명적이었다.


온갖 오물 속에서 잘만 자던 나였지만, 그의 집에 처음 들어온 날 나는 그 특유의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 날밤을 새우고 말았다.


이제는 어렴풋이 남아버린 그 겨울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지만 씨가 나를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갈까?"

지금이야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이 시커멓고 마른 남자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민하고 경계심 많은 내 성격이 내 발목을 잡아끌었겠지만 그날따라 유독 나는 고분고분했다. 마치 그의 구원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여기서 지내면 돼. 이제부턴 여기가 네 집이야."

지만 씨는 내게 가장 작은 방을 내어 주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휑했다. 우측 벽에는 지금의 추레함은 온데간데없이 말끔한 모습의 지만 씨와 그 옆에서 수줍게 팔짱을 낀 여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걸려있었다.

지만 씨에게 그게 누군지 묻고 싶었지만, 내 한국어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아서 헤어질 때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써서 대화도 통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음식부터 수면 시간까지 모든 것이 달랐지만, 외로움이라는 유일한 공통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렸고 지만 씨도 눈을 뜨면 내 방에 들어와 나를 만졌다.

무언가에 홀려도 제대로 홀린 듯이 우리는 틈만 나면 뜨겁게 스킨십을 나눴고 금세 정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손길과 입맞춤이 자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만 씨는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투박하고 정직한 스킨십, 오히려 지루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손길.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자극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그의 손길과 온기에 완전히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이젠 그가 없는 날이면 괜히 불안해졌고, 가끔씩 지만 씨가 하루 이상 집을 비우는 날이면 온정신이 피폐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에게 완전히 빠져든 것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나서부터, 지만 씨는 나에게 일종의 조련(?) 같은 걸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상황까지 밀어붙였다가 확 세게 당겨서 정신이 쏙 빠지게 만드는 것. 그것은 지만 씨의 재능이자, 매력이었다. 지만 씨는 내 입장에서 너무도 흉악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그 야수 같은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했다.


외려 그의 텅 비어버린 듯한 눈동자에서는 이유 모를 아픔과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항상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고, 어느새 그런 폭력에 가까운 것에조차도 중독되기에 이르렀다. 말도 안 통하는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길거리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만 씨가 사라졌다.


지만 씨는 내가 자고 있던 사이에 내가 먹을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음식이 차려진 앉은뱅이 식탁 위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

10여 년이 지나도 한국어를 읽고 쓰는 것을 여태 깨우치지 못했던 나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가득 채워진 쪽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지만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아무리 주워 먹어도 나의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입안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을수록 공허한 마음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뿜어졌다. 그래서 나는 쪽지를 챙겨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밖에서 지만 씨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쪽지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지만 씨가 나를 버린 것인지, 아니면, 지만 씨에게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긴 것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없이 외출을 나온 것은 10년 만이었다. 그의 본격적인 조련이 시작되고 나서, 나에겐 혼자 외출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평소에 외출할 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나고 자란 길거리는 여전했다.

여전히 악취를 풍기는 더러운 길바닥, 싸구려 신문을 깔고 자리를 잡은 길거리 신세들, 쓰레기통에서 하루를 버틸 열량을 찾아 헤매는 가련한 생명체들.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들 때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야! 너 걔 맞지! 이야, 얘는 그대로네!"


상대는 양팔을 푸드덕대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길거리에서 지낼 때 알고 지낸 반가운 얼굴이었다.

녀석은 10년이라는 세월이 두려워질 만큼 많이 늙어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는데 녀석의 얼굴은 눈을 제대로 뜨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름지고 많이 상해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

“사람? 길거리에서 지낼 땐 사람이 싫어서 방황하더니 10년이 참 긴 시간이었구나.”

녀석이 팔등으로 코를 한번 쓱 훑으며 말했다.

나는 상황이 급박함을 알리면서 집에서 가져온 쪽지를 내밀었다,

“이거 읽을 수 있어?"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내 쪽지를 가지고 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빠르고 경박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역시 '촉새'라는 별명다운 움직임이다.

10분도 채 안 되어 촉새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몸이 불편해 보이는 노신사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배터리가 다 되어서 깜빡거리는 손전등처럼 힘없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다시 보게... 이리... 줘봐.” 노신사가 말했다.

촉새는 움직이면서 꼬깃꼬깃해진 쪽지를 노신사에게 펼쳐서 보여줬다.

노신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쪽지를 보다가 곧 목청을 가다듬고 한 자씩 읽어 내려갔다.


[둘도 없는 내 친구 진혁이에게.]

진혁아, 내 부탁을 들어준다니 진심으로 고맙다.

네가 이걸 읽고 있을 땐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겠네.

너는 분명 내 죽음이 슬프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고생해서 이제는 쉬고 싶은 맘뿐이야.


그동안 결혼생활도 어그러지고 가진 것도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겐 너처럼 좋은 친구도 있고, 구름이처럼 착하고 귀여운 강아지도 있어서 떠나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워지는구나.


내가 부탁할 것은 하나뿐이야.

구름이를 잘 키워줘. 나도 길에서 데려온 강아지라서 몇 살인지는 모르겠는데 수의사 말로는 지금 12살 정도래. 이젠 노견이지만 같이 살면서 내가 배변 훈련도 잘 시켰고, 애가 워낙 애교도 많아서 너랑 사는데도 별문제 없을 거야.


다만, 자고 일어나면 주인부터 찾으니까 그때마다 꼭 잘 쓰다듬어주고, 입에서 사료 썩은 냄새가 좀 나도 뽀뽀는 자주 해줬으면 좋겠다. 구름이는 그래야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껴서 편안히 잠드는 것 같더라고.

다시 한번 고맙다 진혁아. 덕분에 편안히 눈 감을 수 있겠어.


PS. 네가 3일 정도 우리 집에 못 올 거라고 해서 집에서 나올 때 먹이는 잔뜩 주긴 했는데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영원한 친구 지만이가


나는 그날, 사람이 아닌 동물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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