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정아, 너 그 이야기 들었어?”
미성은 반경 50미터 내에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수정의 귀에다 소곤거리며 말했다.
“내가 이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지용이가..”
이야긴즉슨 수정의 남자친구 지용이 다른 여자와 모텔에 들어가는 걸 봤다는 것. 수정은 천부당만부당 그럴 리가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지 왜 성질이야? 성질머리 하고는. 쯧.”
불난 데 부채질한 쪽은 본인이면서 미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개를 흔들 때 찰랑거리는 그녀의 머릿결 사이로 목에 불그스름한 흉이 보였다. 누군가 입으로 세게 빤 자국처럼 보인다.
사실 수정의 반응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지용의 바람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연애 11년 차, 동거하고는 있었지만 둘은 이제 몸도, 마음도 섞지 않는다.
“우리 지용이가 그럴 리 없어! 그건 배신이잖아!”
이 모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지용이 국내 최고의 소설 작가가 되겠다며 시작한 칩거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로 지용은 노트북 하나와 책 몇 권을 챙긴 채 가로 2미터, 세로 2미터짜리 골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예술혼에 취해 끼니를 거르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수정이 마치 어미 새처럼 끼니때마다 뜨신 밥과 국, 김치 등 필수영양소가 듬뿍 들어간 음식을 쟁반에 정갈하게 담아 지용의 둥지로 넣어주었다.
[철컥-]
쟁반은 언제나 들어간 지 딱 10분 후 밖으로 나왔다. 지용이 내려놓은 쟁반 위에는 몇 숟갈 뜨지도 않아 식은 밥과 찬들이 우울하게 늘어져 있었고 수정은 그제야 거실에 무너지듯 앉아 철 지난 드라마와 함께 조용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수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지용이 아침마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본인이 쓰고 있던
소설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미출간 된 역작을 최초로 감상하는 듯 벅찼고, 없는 형편에도 고깃국을 마련하기 위해 식당에서 접시를 닦을 땐 고독한 천재를 보필하는 뮤즈가 된 것처럼 영광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사랑은 일반적인 이성 간의 사랑을 넘어 일종의 종교가 되어갔다. 육체적 전희 없이도 정신적으로 최고조 쾌감에 이를 수 있는 관계, 그것은 신성한 교주를 섬기는 마음, 헛된 희생은 없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바람이라니. 그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녀에게 지용의 바람은 둑처럼 단단한 존경심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새빨간 피의 홍수이자, 우주적 공간에 있던 자신을 현실로 곧장 끌어당기는 굵은 동아줄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사실 미성의 말을 듣기 전, 수정도 배신의 전조 증세를 알고 있었다. 지용이 갑자기 취재를 위해 바깥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작품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면서 1년이 넘도록 근처 편의점에도 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취재라니. 처음엔 수정도 그가 단순히 긴 칩거 생활에 방황하는 중이라고 여겼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돈을 빌려 집에 외출복을 잔뜩 시켜놓질 않나, 방에서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등 근력 운동을 하며 몸을 가꾸질 않나, 심지어 몇 개월 전부터 수정이 지용의 쓰레기통을 비울 때 이전처럼 쓰레기통 안에서 비릿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황들로 보아 그녀는 머릿속에서 방정맞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어제 미성의 신고 덕분에 이제야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 밤 고깃집 아르바이트가 끝난 수정이 집에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인기척이 없으니 스산함마저 느껴졌다. 수정은 곧장 지용의 방으로 향했다.
[철컥- 철컥-]
“지용아, 너 안에 있어? 있으면 대답해줘!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지용의 방문은 잠겨있었고 방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벌써 나간 건가?’
수정은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독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속 가득히 퍼진 의심과 불안감이 너무 무거워서 차라리 처음부터 미성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 걸 하며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잡념이 그녀의 목을 졸라 숨통이 덜렁거릴 때쯤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잠깐, 미성이 그년은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미성을 불러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쓸어 올렸다. 온종일 엄지손톱 끝을 반복적으로 깨물어서 끝이 뭉뚝하게 곪아있었다.
미성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2교대 근무를 하는 미성이 이 시간에 깨어있을 리 없었으나 온갖 불순한 생각으로 지배당한 수정의 뇌세포들은 미성과 지용이 모텔방에서 나누는 야릇한 행각을 그려대고 있었다.
급기야 수정은 복도에서 소화기 하나를 꺼내 들고 와서 지용의 문 앞에 섰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의 사랑이 빠져나간 집에서는 묘한 냄새가 풍겼다.
아침에 차려둔 지용을 위한 식사가 상온에서 썩어 들어가는 냄새,
수정의 헌신으로 지울 수 없었던 두 사람의 곤궁 냄새,
그리고 달콤한 사랑이 불쾌한 의구심과 배신감으로 변모하는 냄새.
쾌쾌하고 씁쓸한 여러 가지 냄새가 뒤섞여서 꼭 시체가 썩을 때 나는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수정이 서너 차례 소화기를 내리치자 문고리가 박살이 나며 지용의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방안에 불은 꺼져있었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꽤 밝아서 주변이 어둡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몰아치는 악취에 수정은 왼손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창문도 없어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에서 허리띠에 목이 감긴 남자가 천장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대롱대롱 움직이고 있었다.
“지, 지용아!”
수정이 뛰어 들어갔지만 시계추에는 심장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지용을 얼싸안고 울부짖었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수정은 방언이라도 터진 듯 왜라는 말만 연신 내뱉으며 울었다.
벽에는 소설의 각종 설정에 대한 글과 인물 관계도, 그리고 ‘최고의 작가가 돼서 수정이 호강시켜 주자!’라는
포부가 담긴 글이 표어처럼 쓰여있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쓴 것처럼 악필로 삐뚤빼뚤 투박하게 적힌
글자들이 한 획 한 획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모니터 화면에는 하얀 배경의 메모장이 켜져 있었다.
<수정에게>
수정아.
네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꿈을 이뤄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런 모습이라서 미안해.
재능도, 끈기도 없는데 그동안 네게 고생만 시킨 것 같아 괴롭다.
새벽에 소일거리라도 해보려고 모텔방에 갔는데 아르바이트 경력이 없다고
그마저도 불합격했어. 정말 비참하더라. 어쩌다 내 인생이...
작가 지망생이 쓸 수 있는 가장 슬픈 글을 읽던 수정은 심장에 열꽃이 핀 듯이 아팠고 무너진 하늘을 눈물로라도 메워보고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미성이었다.
“야, 무슨 일로 전화했어? 전화받았으면 말을 좀 해!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네가 맨날 지용이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길래 장난 좀 쳐본 거야! 너 요즘 도대체 왜 그러냐? 걔가 그러다가 진짜 너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미성은 수정이 대꾸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할 말을 쉬지 않고 늘어놓았다.
“아니...”
미성의 핸드폰 스피커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배신은 내가 했어.”
수정은 전화를 끊고 공중에 있던 지용을 끌어당겨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작가로서 소설을 쓰겠다던 그의 손이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END-